청우헌수필

모성의 희망

이청산 2021. 3. 6. 14:53

모성의 희망

 

  어느 낭송가가 낭독하여 유튜브에 올린 나의 글 ‘어느 어머니의 유언’이 조회 수가 5만 회를 넘어 6만 회를 바라보고 있다. 인기 연예인이나 유명 유튜버의 영상이 보여주고 있는 수십만, 수백만 조회 수에 대면 미미한 숫자라 할 수 있지만,  수필 한 편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고들 한다. 

  관심은 글 내용 때문일 수도 있고, 낭독 효과 때문일 수도 있고, 두 가지 모두가 그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감 짙은 목소리로 호소력 있게 읽어 가는 그 낭독 속의 글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기에 흔치 않게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일까.

  사십 대 초반에 공무원이던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35년간을 홀로 오직 일녀삼남 자식들만 바라며 살아오다가 난소암 투병 끝에 78세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야기다. 장례식장에서 공개 그 어머니의 유서가 많은 이들에게 숙연한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7.12.27.)

  유서는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먹여 배부르면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참 행복했다.’고 회고하며, 지아비 잃고 살아가는 험한 세상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도 모두 자식들이라 했다. ‘하느님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 주어 참말로 고맙다.’고도 했다. 사 남매가 성실하게 지내온 역정을 하나하나 토닥여 주면서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며 끝맺고 있다. 

자녀들이 이 애틋한 유서를 읽어 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는 온 장례식장이 흥건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유서에 서려 있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대한 짙은 감동 때문임은 말할 나위 없다.

  당신이 있어 자식들이 잘살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식들이 잘 돌봐주어 당신이 잘살고 행복했다고 한다. 곱게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주어 참으로 고맙다면서 슬픔에 잠길 자식들을 오히려 다독이고 있다. 그 오롯한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이런 어머니의 자식들이라면, 바른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르게 성장하여 잘살아 준 자식을 두고 어머니는 고맙다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사랑의 따스한 순환인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물론 모성에서 나온다. ‘모성(母性)’을 사전에서는 여성이 어머니로서 가지는 정신적·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학설에는 모성은 본능이다.’라는 설도 있고, ‘모성은 사회화의 산물이다.’라는 설도 있는 모양이다.

  모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볼 수 있다. 펠리컨이라는 새는 먹이를 부지런히 날라다 부리 주머니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새끼들이 배고파할 때 먹인다고 한다. 먹이가 궁해지면 자신의 가슴 털을 뜯고 살을 찢어 먹이고, 병으로 죽어가기라도 하면 자신의 핏줄을 끊어 입에 넣어준다고도 한다. 이런 모성도 사회와의 산물일까.

  모성이 본능이거나 사회화에서 생겨난 것이거나 간에 사랑이 없는 모성이란 있을 수 없다. 모성이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어머니는 있지만 모성곧 사랑이 없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떠올리기조차도 살 떨리는 일이지만, 의붓자식이나 입양아를 무도하게 구박하여 마침내는 치사 혹은 살인으로 이어져 못다 핀 여린 목숨을 무참하게 꺾어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몸소 산고를 겪으며 얻은 자식도 학대하고 방치, 방기하여 무고한 어린 목숨에 참혹한 고통을 주거나, 심지어는 목숨이 끊어지게까지 하는 무서운 부모가 있다는 뉴스가 연일 들린다

  ‘모성애19세기 이후 국가가 여성에게 아이 돌보는 본능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근대화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있다지만, 누가 모성애 부성애며 그 숭고한 사랑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 사랑을 거리낌 없이 팽개치고 일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부모들이 만연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장차 우리네 가정 윤리며 사회 도덕이 어떻게 치달아갈 것인지, 상상만 해도 캄캄한 절벽이 앞을 막아서는 듯하다.

  그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 한 줄기 가느다란 빛살은 없지 않은 것 같아 여린 안도의 숨결을 가누어 본다. 어느 어머니의 유언장에 새겨져 있는 깊고 뜨거운 자애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짓는 사람들이 있고, 그 유언의 사연을 소개하는 글 한 편에 공감해주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있고 보면, 목숨 사랑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따듯한 안도감이 감돌기도 한다. 가녀린 희망의 꽃씨나마 소곳하게 안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유언에 눈물짓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성의 사랑에 대한 경외의 마음과 함께 진득한 그리움이 배어있지 않을까. 그 곡진한 마음을 전해주는 글에 쏟아지는 마음에는 자신도 그런 사랑의 어버이로 살고 싶은 소박한 희구가 녹아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들이 있다면 사람이 사람 되어 사람으로 사는 삶과 더불어 따사로운 사랑이며 그 희망의 꽃이 곱게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네,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그 모성의 눈물겨운 울림에 함께 눈물짓는 사람들이 있는 한.(20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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