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내 삶 속의 작은 회심

이청산 2020. 12. 10. 18:42

내 삶 속의 작은 회심

 

  세월이 조금은 쌓인 탓인지 가끔씩 지난날이 돌아보일 때가 있다. 허망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세월 되도록 잘한 일이 무엇이며, 괜찮게 이루어놓은 일은 무엇인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차스럽게 숨줄만 이어온 것 같아 누가 보지 않는데도 얼굴에 홍조가 인다.

  그런대로 눈을 씻고 지난 일을 뒤지다 보면 집히는 게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아 작은 위안을 얻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울릉문학회금오산수필문학회를 만든 일이다. 내가 아니면 못 했거나 늦어졌을 일이기 때문이고, 그런 것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십여 년 전, 몇 해 전에 근무했던 울릉도를 못 잊어 다시 근무지로 택하여 찾아갔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기기묘묘한 풍광이며 섬사람들의 순박한 인심에 매료되었던 기억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육지로 나온 후에는 그 감동과 감회를 책으로 엮기도 했었다. 

두 번째로 그 섬을 찾았을 때는 초행 때의 감동보다 좀 덜하긴 했지만, 섬은 역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문화적으로는 매우 척박한 곳이라는 데에 눈길이 돌려졌다. 감동에 이성을 더하여 섬의 삶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인들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섬을 다녀가기만 하면 아름다운 작품이 이루어져 나오는데, 섬사람들 가운데서는 왜 예술 작품이 나오지 않는가. 그 정서의 샘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어 올릴 두레박이 없어서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문학회를 만들어 그 두레박이 되어 섬사람들의 정서를 길어 보자 했다.

  알음알음으로 찾아도 보고 권유도 하여 마침내 뜻을 같이하는 십여 명의 회원을 모았다. 봄이 무르익어가던 오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작품을 나누어 읽으며 기량을 다져갔다. 섬 살이의 애환을 그린 내용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화원에서도 그 뜻에 호응하여 출판비 부담을 자임하고 나섰다. 단비 같은 일이었다. 회가 창립된 지 한 해가 될 즈음 드디어 회지 창간호를 내게 되었다. 녹음이 짙어갈 무렵 모든 회원을 비롯한 지역의 각계 인사들과 함께 창간호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때 나는 개척민의 심정으로라는 제목의 창간사를 썼었다. 함께한 이들은 섬의 역사, 문화, 문학의 새로운 꽃을 피울 것이라는 기대와 긍지가 넘쳐났다.

  그렇게 문학회를 만들어 회지 창간호를 내어놓고 전근이 되어 육지로 떠나왔다. 그 세월도 십여 년이나 흘렀다. 그 세월 속에 나는 섬사람들에게 잊혔을지 몰라도, 회지는 해를 거르지 않고 매년 나오고 있고, 회원들도 활동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섬의 역사 한 부분을 개척했다는 자긍심은 지금도 남몰래 나의 것이 되어 있다.

  수필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아온 지도 그럭저럭 반평생 가까이 되어가고 있다. 한 생애를 마감하고 산수에 묻혀 사는 지금은 더욱이 수필과는 뗄 수 없이 살고 있다. 이 생애 가운데 시 낭송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시 외기를 함께 즐기고도 있다. 내가 오랜 세월 수필에 탐닉하고 있음을 안 낭송 회원 몇 사람이 수필도 함께 공부해 보고 싶다고 했다.  

글이 좋아 함께 공부해 보고 싶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쏜가. 지금부터 사오 년 전, 어느 초봄에 몇 사람이 모여 공부를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어느 교회당 뒷방이며 아파트 휴게실 들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공부했지만, 글쓰기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두어 해 전부터 공립 도서관의 한 방을 얻어 공부하던 중에 도서관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채택되면서 공부는 한층 활기를 더해 갔다.

  공부해나가는 사이에 그 결과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가수에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듯이-. 마침 내가 조그만 문학상과 약간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그걸 종자 회비로 전액 내어놓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낭송 회원 중에 상당한 문단 이력을 가진 분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문학회를 꾸렸다.  

공부와 함께 합평회를 통해 작품을 나누어보는 수련을 거듭하다가 문학회를 시작한 지 한 해 만에 첫 회지를 내게 되었다. 갓 난 붙이를 처음 품에 안아보는 감격에 못지않았다. 처음으로 글과 이름을 책에 실어보는 회원들의 감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회비도 알뜰히 모아 두 번째의 책을 낼 때는 종합 문예지에서 수필 전문지로 성격을 바꾸어 수필 공부에 더욱 진력하기로 했다. 문학회 합평회며 도서관 평생교육 수필창작과정을 통해 기량을 더욱 다져가며, 세 번째 책을 낼 때는 경북문화재단으로부터 출판비 일부도 보조받게 되었다. 수필을 향한 애정과 열정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이제 우리의 책은 명실공히 문학 연마의 장인 동시에 그 결과의 산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내 힘만이랴. 뜻을 같이해 줄 사람들이 없었다면 될 일이 아니었다. 그 산파역에 대한 조그만 긍지라도 여밀수록 마음 함께 모아준 사람들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문학을 향한 열정을 태워왔다 하나 성과를 말하기엔 아직 이를지 모른다. 다만, 나의 작은 애씀으로 인해 한 지역의 문화에 조그만 이바지라도 되었다면, 글과 친해지고 싶은 이들에게 여린 마중물이나마 되었다면 문학과 더불어 살아온 내 삶의 한 보람으로 새겨보고도 싶다.

  이제 나에게, 새로운 일들을 해내기에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수필 공부에 애정 어린 정진을 거듭해감으로써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삶이 더욱 기꺼워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보람이 무엇에 있을까. 못한 것이 참 많은 나의 삶 속에 작으나마 회심會心의 미소를 그릴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가방을 들고 도서관 수필교실을 향해 나선다. (20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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