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어리적어서 어쩔꼬

이청산 2020. 11. 15. 14:48

어리적어서 어쩔꼬

 

  어쩌다 지나온 삶을 한번 돌아보는데, 문득 어리적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나를 두고 가끔씩 어리적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군대엘 갈 때도,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발을 내디딜 때도 이따금 엷은 미소와 함께 나를 쳐다 보시며 어리적어서 어쩔꼬?’라 하셨다.

  나중에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지만, 어떤 곳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말이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를 뜻하는 어리석다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하는데, 설마 자식을 두고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어리적다어리석다의 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보며 미소짓던 부모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여덟 살 때까지 막내로 자라면서 부모님의 온갖 귀염을 다 받았다. 위로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었지만, 아들 둘을 내리 없앤 다음에 얻은 것이라 막내라고 여기며 온갖 귀염을 다 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응석받이로 자라온 탓에 어리적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쉼 없이 흘러 군대 생활을 거쳐 학교를 마저 마치고, 사회를 살아오는 사이에 부모님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나도 맡고 있던 직책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지금은 아버지가 누리신 세월보다 훨씬 더 긴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께서 이승에 남기신 연륜만큼 세상 빛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세 곱절도 더 넘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 때마다 숱하게 쌓여 있는 지난날들이 슬몃슬몃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을 보면서, 그런대로 학업을 무난히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해보리라 마음을 다지며, 해야 할 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려고 애썼다. 생각과 힘이 모자란 일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인정을 얻은 일도 없지 않았다.

  내가 해놓은 일을 제 것인 양 가져가서 제 얼굴을 내세우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 안 하고도 못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바르게 밝혀지면 다행이지만, 밝혀지지 않아도 밝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쌓여 가면서 사회적 이력도 늘어나, 힘들게나마 한 기관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어떤 자리의 일이든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내가 생각이 모자라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끼친 일도 있었던 것 같고, 하는 일들이 내 마음같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려움을 느껴야 했던 적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성대하게 베풀어주는 퇴임식을 끝으로 한 생애를 마감했지만, 돌아볼수록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 적잖이 떠오른다.

  내 사사로운 삶도 그리 탐탁스럽게 이루어내지는 못한 것 같다. 집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모든 것이 덩둘했지만, 특히 물질을 다스리는 일에는 아주 손방이었다. 재물을 모으는 데도 솜씨가 없었지만, 소비에도 서툴기만 했다. 옷을 하나 갖추어 입는 데도, 가구를 들여놓는 데도, 심지어는 오랜 고심 끝에 집 하나 장만하는 데도, 이루어 놓고 보면 모두가 남보다 처진 것이었다. 들일 힘 다 들이고도 그랬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일만 해도 그렇다. 한 생애를 마감하고, 세상 자유 다 누리면서 느긋하게 살아보리라 하고 산과 물이 좋은 어느 한촌을 찾아 조그만 집을 지어 수년째 살아가고 있다. 아내는 집이 편치 않다고 이따금 불평을 늘이며, 지금도 더 나은 집을 그리고 있다.

  살아온 일을 이리 돌이키다 보면 부모님이 나를 두고 걱정하시던 어리적다라는 말씀의 뜻이 다시 뇌어지면서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내 살아온 행적에 맞추어 그 말씀을 헤아려 보면 세상일에 재바르지 않고, 약삭빠르지도 못하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해야 저한테 이득이 되는지도 모르고, 그러다 보니 속셈을 차릴 줄도 모르고, 하는 일마다 곧장 손을 볼 것 같다는 걱정이 어린 말씀이었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신 말씀일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알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그 말씀을 되새겨 본다. 그 속에는 걱정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너무 약삭빠르게 살지 말고, 너무 득만 보고 살려고도 하지 말라는 충언의 뜻과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담아 그 사랑으로 해주신 말씀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내 살아온 일을 다시 돌아보면 사람 관계를 잘 건사할 줄 모르고, 재주도 따라 주지 않아 때로는 오해나 원을 사기도 했을지라도, 내가 조금 힘들지언정 남을 크게 힘들게 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내가 손을 볼지언정 남이 해 입을 일은 그다지 하지 않은 것 같다.

  부모님의 말씀처럼 내가 어리적은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왔던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 대해 아내는 불만이 없지 않다. 다른 이는 몰라도 아내는 적이 힘들게 한 것 같다. 그것도 내가 어리적은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래도 다시 그립다. ‘어리적다하는 부모님의 그 말씀-.(20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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