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술, 인간의 속성 훤히 드러내
'그 많던 싱아…' 100만부… 세대초월 사랑받은 국민작가
"6·25전쟁 통에 오빠와 삼촌을 잃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 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소설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나목'으로 나이 마흔에 등단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요."- ▲ 박완서씨가 지난해‘현대문학’2월호에 마지막 단편‘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를 발표한 직후 자택 서재에서의 모습. 박씨는“나는‘영원한 현역작가’로 불러줄 때 기분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주완중기자 wjjoo@chosun.com
박완서는 문학적 성취와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행복한 작가였다. 1992년 출간한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30년대 고향 개풍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전쟁을 기억한 작품으로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그녀가 77세의 고령에 발표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30만부나 나가며 그녀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작가임을 증명했다.
노년의 박완서는 '부숭이의 땅힘'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등 동화집을 쓰며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어린이들에게 전하려 애썼다. 지난해 소설가 정이현씨가 엄마가 되자 젊은 부부와 아기가 그려진 엽서에다 "아가야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서 엄마 아빠의 기쁨이 되거라. 박완서 할머니가"라고 써서 주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나눈 아름다운 교유를 통해서도 그녀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2009년 김 추기경의 선종을 접한 박완서씨는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너그러운 인품과 넉넉한 포용의 경지는 곧 그녀가 삶에서 추구했던 덕목이었다.
박완서는 고향 방문을 염원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 식의 귀향'이란 글에서 그녀는 고향에 가지 못한 원초적 상실감과 지금도 계속되는 분단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내가 살아온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펴낸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그토록 이해 못할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문학의 큰나무로 우뚝 선 삶의 보람을 담고 있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만물상] 박완서가 남긴 것
- 입력 : 2011.01.23 23:30 / 수정 : 2011.01.24 13:06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대뜸 내 코 앞까지 뻗어와 우뚝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긴 머리의 아가씨가 살짝 웃고 있었다." 박완서가 마흔살에 쓴 데뷔작 '나목(裸木)'의 첫 구절이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미군 PX에 근무하는 소녀가 달러 한 장을 벌기 위해 미군 병사를 꼬여 그의 애인 초상화를 주문받으려는 장면이다.
▶소동파는 "글 중에 좋은 글은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이라고 했다. '나목'의 소녀는 대학 입학 한 달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소녀가장으로 삶의 최전선에 내몰려야 했던 박완서 자신이다. 그는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가정을 꾸린 20년 후에도 전쟁이 몰고 온 고달픔과 억울함, 절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누가 들어주건 말건 외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절박함, 그게 박완서 문학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박완서에게서 고향인 개성 박적골에서 키웠던 어린 시절 꿈과 청춘을 빼앗아갔다. 그는 이런 아픔을 소설에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구원받고 아픔 속에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동인문학상 심사 자리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작가 작품이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앞장서 칼날 같은 비평을 하던 박완서였다. 그런 한편 여자 후배가 임신을 하면 "순산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갈비와 냉면을 사주고 소주병 가득 참기름을 담아주기도 했다. 설날 출판사 편집자들이 세배를 가면 직급에 따라 1만원 2만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8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는 남몰래 수백만원씩 도왔다.
▶작년 8월 나온 그의 생애 마지막 책 제목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였다. 그 직전 나온 마지막 동화책 제목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이다. 이런 아쉬움도 있고 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게 그의 노년의 심경이었을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앞서 간 그의 남편과 아들 묘비에는 박완서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생년월일만 있고 몰년(沒年)은 비어 있던 자리가 이제 채워지게 됐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나목을 보고 박완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꼭 이렇게 말하며 서 있는 것 같다."
▶소동파는 "글 중에 좋은 글은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이라고 했다. '나목'의 소녀는 대학 입학 한 달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소녀가장으로 삶의 최전선에 내몰려야 했던 박완서 자신이다. 그는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가정을 꾸린 20년 후에도 전쟁이 몰고 온 고달픔과 억울함, 절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누가 들어주건 말건 외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절박함, 그게 박완서 문학의 시작이었다.
▶동인문학상 심사 자리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작가 작품이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앞장서 칼날 같은 비평을 하던 박완서였다. 그런 한편 여자 후배가 임신을 하면 "순산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갈비와 냉면을 사주고 소주병 가득 참기름을 담아주기도 했다. 설날 출판사 편집자들이 세배를 가면 직급에 따라 1만원 2만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8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는 남몰래 수백만원씩 도왔다.
▶작년 8월 나온 그의 생애 마지막 책 제목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였다. 그 직전 나온 마지막 동화책 제목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이다. 이런 아쉬움도 있고 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게 그의 노년의 심경이었을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앞서 간 그의 남편과 아들 묘비에는 박완서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생년월일만 있고 몰년(沒年)은 비어 있던 자리가 이제 채워지게 됐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나목을 보고 박완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꼭 이렇게 말하며 서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