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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은 흙집에 살어리랏다

이청산 2008. 9. 30. 09:30

내가 지은 흙집에 살어리랏다
● 황토·볏짚… '친환경 건축 운동' 확산
"벌이나 새도 자기 집 스스로 짓는데…"
원주=박은호 기자 unopark@chosun.com

고제순 : 일주일만에 흙집 짓기




지난 26일 강원도 원주시 매지리의 한 야산 중턱에 작은 공사판이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여명이 단층 황토 흙집을 짓고 있었다. 전직 경찰관과 농사를 짓는 50대 촌부(村婦), 막 직장을 그만둔 30대 남성까지 인부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충북 충주에서 올라왔다는 김지애(50·여)씨는 "늦둥이 딸(30개월)과 함께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는 친환경적인 집에서 살기 위해 (흙집 짓기를) 배우러 왔다"며 "내년 봄에 내 손으로 집 짓기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김씨를 비롯해 "난생 처음 집을 지어본다"는 이들이 서투른 손놀림으로 집 짓기에 나선 지 26일로 엿새째. 한쪽에선 끌과 망치로 문틀을 짜고, 다른 쪽에선 황토벽이 칸칸이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흙집 짓기는 환경운동이자 생명운동"

"(황토 벽돌의) 반듯한 면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쌓아야 (집이) 예뻐지고 더 튼튼해집니다." "이렇게 어긋나게 홈을 내면 창문이 비뚤어지는데…. 다시 하세요."

이 공사판의 유일한 숙련공은 고제순(49)씨였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공사판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상물림이었다. 1993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칼 포퍼의 철학이념'이란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해 2년여간 대학 강단에 섰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헛공부를 하고, 헛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 흙집 건축가 고제순(왼쪽)씨가 26일 강원도 원주시 매지리의 한 야산 중턱에서‘흙집 짓기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흙을 반죽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인간생활의 근본은 먹는 것과 사는 곳, 그리고 질병을 치유하는 식주의(食住醫) 세 가지인데,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내가 자립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가슴을 때렸다"는 것이다.

여기에 원주 시내 한 아파트에 살면서 아토피까지 생기자 전국을 돌며 자기 손으로 집 짓는 방법을 배우고, 기와집과 초가집, 귀틀집, 너와집 같은 전통 가옥에 대한 공부에 나섰다.

5년쯤 지나 자신감을 얻은 고씨는 2000년 가족과 함께 이곳 산골에 들어와 방 세 칸짜리 황토집을 직접 짓고 살았다. 아토피도 깨끗이 사라졌고, 2004년부터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아예 '흙집 짓기 운동'에 나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700여 명의 '문하생'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서로 품앗이를 하며 집 짓기를 도와주는 방식으로 현재 30~40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흙집을 지어 살고 있다.

"벌이나 거미 같은 곤충과 새들은 스스로 집을 짓습니다. 사람이라고 못할 게 있나요? 흙집은 짓기도 쉬울 뿐더러 건강을 살리고 환경을 지키는 생태적인 건축법입니다."

고씨는 "흙집 짓기 자체가 환경운동이고 생명운동"이라고 했다. 콘크리트 아파트 일색인 현대 주거문화는 수명이 50~60년에 불과한 데다, 사람을 병들게 하고 결국엔 지구에 폐기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지만, "흙과 나무, 돌로 지은 흙집은 수명이 500년 이상 가고, 허물더라도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니 이보다 더 친환경적인 방식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국 각지에 흙집짓기 센터를 만들어 일정액의 공사비를 받고 흙집을 시공해주는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환경운동에도 '자립'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씨는 "정부 지원금이나 후원금 등에 의존하는 환경운동은 본래의 취지와 달리 위축될 수 있다"며 "지속가능한 환경운동이 되려면 반드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확산되는 '생태 건축'

고씨처럼 '생태 건축' 운동을 벌이는 곳은 또 있다. 한국스트로베일건축연구회 이웅희(46) 대표는 2005년부터 볏짚과 흙, 나무로 집을 짓는 '스트로베일(strawbale) 집짓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스트로베일 집은 나무로 집의 뼈대를 세운 뒤 단단하게 압축한 육면체의 볏짚으로 벽체를 쌓은 뒤 그 위에 흙을 발라 시공한 집을 말한다.

3년 전, 강원도 영월 동강 제장마을에 1호 집이 생긴 뒤 현재 전국에 35채가 지어졌다. 이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의 동호인은 8000여 명. 이씨는 "스트로베일 집은 1880년대 미국에서 먼저 시작돼 현재 유럽 각국과 중국, 몽골 등지에서 확산 중"이라며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단열효과가 높아 생태주택으로서의 장점을 골고루 갖췄다"고 말했다.

충북 음성군에서 '황토명상마을'을 짓고 있는 이시화(53)씨도 2006년 11월부터 일반인들을 상대로 '황토집 짓기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씨는 "콘크리트를 비롯해 기존 주택의 재료는 모두 화석연료 에너지가 쓰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황토집은 그 자체가 친환경적인 건축법"이라고 했다. 황토집과 스트로베일 집을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3㎡에 평균 250만~350만원 안팎. 이씨는 "일반 콘크리트 주택보다 건축비가 싼 것은 아니지만 건축법을 배운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 인건비를 줄이면 가격이 더 싸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