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섬마을 선생님

이청산 2007. 10. 6. 16:22
  • [이덕일 사랑] 섬마을 선생님
  •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01.24 22:38 / 수정 : 2007.01.25 00:07

    •  

    • 섬 유배(流配)는 당사자에겐 괴로운 형벌이었지만 그 지역 주민들로서는 대과(大科)에 급제한 일류 교사에게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축복이기도 했다. 순조 1년(1801) 정치적 박해를 받아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丁若銓)은 ‘자산어보’(玆山魚譜) 서문에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으로 썼다. 자(玆)자는 흑(黑)자와 같다”라고 쓸 정도로 흑산도 유배를 두려워했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700여 명이었는데 동생 정약용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형님은)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다투어 자기 집에만 있어 주기를 원했다”라고 쓸 정도로 정약전을 환영했다. 정약전이 환영받은 것은 섬 아이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흑산도 사리 언덕에는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복성재(復性齋·사둔서당)가 남아 있다.

      정약전은 순조14년(1814) 강진에 유배돼 있던 정약용이 풀려난다는 소문이 돌자 동생에게 바다를 두 번 건너게 할 수 없다며 흑산도 앞의 섬 우이도로 옮기려 했다. 흑산도 사람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서자 우이도 사람들은 안개 낀 야밤에 배를 대고 정약전을 모셔갔다. 안개가 걷힌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흑산도 사람들은 급히 추격대를 조직해 정약전을 다시 모셔왔다. 정약전은 1년 가까이 흑산도 사람들을 설득해 겨우 우이도로 이주했으나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정약전도 순조 16년(1816) 6월 우이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약용이 이굉보(李紘父)에게 “온 섬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다”라고 쓴 것처럼 섬사람들은 불행했지만 진정한 선생님에게 예의를 다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도서벽지 근무교사에게 주는 가산점을 줄이겠다고 하자 도서벽지 근무 교사들의 전근신청이 잇따른다는 소식이다. 유배객의 신분으로 섬사람들을 감동시켰던 정약전의 교육정신과 벽지 교사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가 모두 아쉽다.

     

  • [이덕일 사랑] 동해고(東海考)
  • 입력 : 2007.01.22 23:20
    •  
    • 산하(山河)의 명칭은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을 담고 있다. 우리 역사 사료에 동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동명왕’조이다.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 “동해 바닷가(東海之濱)의 가섭원(迦葉原)이 기름져 오곡이 잘 자랄 것이니 도읍으로 삼으라”고 권고하자 임금 해부루에게 권해 천도(遷都)했다는 기사다. 이곳이 동부여인데 옛 도읍지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내려와 도읍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이때를 한(漢)나라 신작(神爵) 3년, 즉 서기전 59년이라고 기록했다. 2000여년 전의 선조들도 동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삼국유사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조는 ‘동해 바닷가(東海濱)에 살던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간 후 신라의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이름에 모두 까마귀(烏)자가 있고, 해와 달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고구려 벽화 속의 삼족오(三足烏), 즉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陽烏傳說)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재위 11년(928) 후백제 견훤에게 보낸 국서에서 “해동(海東)의 끊어진 대를 계승할 수 있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해동은 중국에서 볼 때는 서해의 동쪽이지만 고려에서는 동해(東海)와 함께 고려의 별칭이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恭讓王) 3년(1391)’조에는 도평의사사에서 “우리 동방의 돈으로 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해동중보(海東重寶)·동해통보(東海通寶) 같은 것이 중국의 책에 기재되어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는데, 해동·동해가 모두 고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세조실록’ 10년의 원구단에 제사하는 조항을 보면 제사 대상 중에 동해위(東海位)가 포함되어 있다. 동해는 서기전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동해로 불려 왔다는 뜻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고 제안했던 사실이 개헌논란에 덮여 넘어가서는 안 된다. 동해뿐만 아니라 헌법상의 영토조항과 간도문제까지 우리의 모든 영토문제를 국시(國是)로 정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자 료 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과 간질환  (0) 2007.10.06
    '메가트렌드' 저자, '미래학 거두' 나이스빗  (0) 2007.10.06
    스트레스 이기는 82가지 방법  (0) 2007.10.06
    책맹(冊盲)  (0) 2007.10.06
    술버릇으로 가늠하는 알코올 의존증  (0) 200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