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때가 오면

이청산 2026. 5. 9. 14:33

그때가 오면

 

  해사하고도 화사하게 강둑을 수놓던 강둑의 왕벚꽃이며, 산을 무늬 짓던 산벚꽃이 다 지고, 꽃의 자리를 푸른 잎들이 차지하고 있다. 꽃이 피었을 때가 먼 옛적인 듯 아스라하다. 저 꽃 속에 있을 때는 나의 복지인 듯 아늑했는데, 푸른 잎들은 나를 내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달력이 봄을 알려 와도 벚꽃이 피기 전에는 나의 봄은 아니었다. 강둑을 걷는 아침마다 벚나무의 꽃눈을 보고 또 보았다. 아주 조금씩 눈을 떠가는 모습이 신기하고도 애가 타기도 했다. 달라져 가는 게 없다 싶을 때는 애가 탔지만, 하루 건너서 보면 조금은 눈을 틔운 것 같아 신기하고도 반가웠다.

  올해만이랴, 해마다 그렇게 기다려 왔지만, 반갑게 기다리는 마음은 그제나 이제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애를 태워 가던 어느 날, 마치 무슨 무성영화에서 기총소사 전쟁판이라도 벌어진 듯 이 가지, 저 가지, 이 나무, 저 나무에서 꽃이 다다닥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황홀할 수가 있는가. 내 생애의 봄날들이 다투어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다. 생애의 봄날이 왔다. 저 빛을 무어라 할까. 연분홍 수줍음이라 할까, 우윳빛 순수라 할까. 갓 피어난 봉오리는 붉은 기운이 도는 듯한 연한 분홍으로 수줍은 색시 같은 미소를 머금더니, 송이가 온전히 벌어 맑은 햇살을 받을 때는 눈이 시릴 만큼 눈부신 순백이 온몸을 적셔 오는 듯했다.

  저 빛은 또 무엇인가. 붉게 물든 화심을 감싸고 있는 하얀 꽃잎은 마치 연지 곤지를 찍은 새색시같이 보이다가도, 햇살을 받는가 싶더니 따스한 황금빛과 어우러진 듯한 분홍색은 살짝 살굿빛을 띠면서 다시 수줍음 타는 모습을 내보이기도 한다. 정감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아 눈길을 바꿀 수가 없다.

  저 빛깔들은 누가 보든, 어린이가 보든 젊은이가 보든 늙은이가 보든 속 깊은 정이 넘쳐나게 할 것 같다. 같이 보고 싶다.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보며 마음을 나누고 싶다. 꽃 보러 오라고 했다. 때를 번갈아 몇 사람이 달려왔다. 꽃그늘을 걸으며 정담을 나눈다. 정이 붉은 화심이 되고 담소가 정결한 꽃잎이 되어 나부낀다.

  모두 이 꽃 속에 사는 나를 부러워한다. 나도 내가 부럽다. 이렇게 화사한 꽃 속을 정 깊은 사람들과 함께 거닐고 있는 내 모습이 언제 또 있었으며 언제 다시 올 것인가.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거닐던 꽃그늘에 꽃비가 내린다. 꽃길을 걷는다.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게 멀어져 간다.

  만남은 짧고 그리움은 길다고 했던가. 그 화려했던 꽃의 시간들은 그리움으로만 남았다. 짙어 가는 꽃길 위로 가지는 비어간다. 꽃잎이 진 가지에 붉은 꽃자루가 다시 다홍의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그도 잠시 잎들이 빼죽 빼죽 솟아 가지가 푸르러진다. 강둑은 이내 푸른 숲길이 된다.

  저 싱그러운 푸름을 보면 꽃의 시절이 다시 그리워진다. 저 푸름을 보며 활짝 피어나는 기운이며 용출하는 듯한 활력 같은 건 느껴 볼 수 없는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지만, 나의 시절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저 푸름이 나를 변방으로 밀어내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또 무슨 자격지심일까.

  어느 시인은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김지하, 「새봄9」)라 하여 변해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변하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함께 품는 따뜻한 속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왜 꽃 시절의 그 정다움이 더 그리운가. 내가 지금 꽃 시절 속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푸름의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지 않은가.

  그 꽃 시절은 별로 여물 겨를도 없이 그리도 허망하게 져버렸지만, 나는 다시 올 꽃 시절을 기다릴 것이다. 누구는 “벚꽃이 피었다는 것은, 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라 하지 않았던가. 혹독한 추위 끝에 일제히 터져 나오는 꽃망울은 내 쇠잔해 가는 삶을 빌어주는 누군가의 기도일 수도 있다는 말로도 들려 온다.

그 기도 속에서 다시 피고 싶다. 저 꽃핀 강둑을 보라, 그 꽃을 안고 흐르는 강물을 보라. 봄이 강에 하얀 별들을 뿌려놓은 것 같지 않은가. 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 하얀 별 속을 유유히 걷고 싶다. 그 별을 타고 꽃잎처럼 날고도 싶다. 나를 밀어낼 푸름의 길이 아니라 나를 안아 줄 그 꽃그늘 길을 걸음 가볍게 걷고도 싶다.

  그때가 오면, 그 기총소사하듯 한꺼번에 일매지게 피어나 연분홍빛 보듬으며 순백의 미소를 뿜어내던 그 꽃 시절이 다시 오면, 정겨운 사람에게 또 손짓할 것이다. 그때 그랬듯 정을 화심으로 삼아 담소를 정결한 꽃잎으로 새로이 피워낼 것이다. 그 꽃그늘 길을 그렇게 함께 걸을 것이다.

  그때가 오면-. ♣(2026. 4. 30)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꽃은 들꽃대로  (0) 2026.06.07
댑싸리 전설(5)  (0) 2026.05.20
벚꽃 약속  (1) 2026.04.20
모처럼의 외출  (1) 2026.04.06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1) 2026.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