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약속

몇 달에 걸친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던 날, 의사는 나에게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불전佛典의 가르침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공부도 하고 있는 그가 나에게 준 책은 ‘마음을 잘 쓰는 법’을 이야기한 불교심리학에 관한 책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 책 뒤표지 속에 “귀한 인연에 감사드리며 몸도 마음도 늘 평안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벚꽃 보기 좋은 날 꼭 초대해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정중한 서명을 해놓았다.

진료를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봄이 되면 우리 마을 강둑에는 왕벚꽃이, 뒷산에는 산벚꽃이 찬란하게 피어나 꽃 대궐을 이룬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 현란한 풍경을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다 했다. 내 그 말이 기억에 깊이 남았던 것 같다. “예, 잊지 않겠습니다. 꼭 초대하겠습니다.”라며 약속 문자를 보냈다.
요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지내고 싶어 크고 작은 병원을 드나들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요통 치료’라는 어느 의원 안내판을 보고 찾아간 게 그와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의사는 친절했다. 진료에 갖은 정성을 다 기울이는 것 같았다. 단순한 직업적인 친절 같지만은 않았다. 맥을 짚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어린 진정한 마음이 전류처럼 몸으로 스며오는 듯했다. 심신이 약한 환자를 향한 의사의 본능적인 마음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 사랑’에서 솟아 나오는 넓고도 따뜻한 마음인 것 같았다.

그 친절과 정성만으로도 내 병이 언젠가는 쾌유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내가 마침 어느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는 중이어서, 어느 날 칼럼에 「즐거운 병원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친절과 정성을 이야기했다. 즐겁지 않을 수 있는 병원 길을 즐겁다 한 것이 역설적일 수 있지만, 나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그 칼럼을 의사에게 보여 주었다. 감동으로 감격스러웠다 했다 내가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는 걸 검색을 통해 알았다며,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다 했다. 과분한 말씀이라 하니, 다른 글도 보고 싶다고 했다. 근간 수필집 한 권을 건네주었다. 고맙다며 몇 가지 보신 약재를 챙겨주기도 했다.

그도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동화를 써 보고 있다고 했다. 자기는 내 몸을 치료해 줄 터이니 나는 자기 글을 좀 치료해 달라 했다. 쓴 글을 보고 싶다 했다. 그가 쓴 글 속에는 불법佛法의 이치를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로 풀어낸 그림 동화 형식의 글도 있었다. 나름대로 뜻있는 주제와 상념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바쁜 진료 시간을 벗어나 메일이며 에스앤에스로 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서로의 삶의 모습에 대해 많은 이해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 병통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가면서도 그 친절과 정성이 병고를 충분히 다스려 줄 것이라는 내 믿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 ‘즐거운 병원 길’이 계속되었다.
그사이에 봄,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있었다. 몸을 떠나지 않던 통증이 시나브로 잦아들면서 움직임이 조금씩 가벼워져 가는 듯했다. 내 믿음이 효능을 발휘하는 것일까. 일주일에 두 번씩 받던 치료를 한 번으로 줄였다. 그래도 견딜 만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던 세모에 가까운 어느 날, 치료를 그만해 보자 했다. 그만해도 될 것 같았다.
마지막 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서던 날, 마음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을 주면서 우리 마을 벚꽃을 기약한 그 바람 속에는, 나의 건강을 기원도 하면서, 확인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었을 것 같다. 겨울이 가고 약속의 봄이 왔다. 벚꽃이 피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마을 강둑에 벚꽃이 만발했다. “진료 업무에 늘 바쁘시지요? / 지금 우리 동네 강둑에는 벚꽃이 한창 피고 있습니다. / 토요일 오후, 시간이 있으시겠는지요? / 시간 되면 전화 한번 주십시오~.” 토요일은 학회가 있어 수요일 오후가 어떻겠냐는 전화가 왔다. 좋다 했다.
그날, 만발한 강둑 벚꽃이 한눈에 보이는 다리로 오라 했다. 수요일 약속 시각 무렵, 다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를 인연 짓게 했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검은색 차가 다리를 천천히 건너오고 있었다. 다리 어귀에서 차가 멈추면서 그가 내렸다.

반가웠다. “얼굴빛이 아주 좋으시네요. 꽃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내 손을 잡았다. 석 달여 만이었다.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서로 반갑다 하면서 화사한 벚꽃 길을 함께 걸었다. “좋은 기억이 될 것 같네요.”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기억이 마음 주머니에 들면 좋은 마음이 되겠지요?” 마주 보며 웃었다.
몸이 한결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꽃도 마음도 기억도 언젠가는 다 흘러갈 것이지만, 오래 지지 않을 것 하나 남겨 두자며, 지나는 이에게 부탁했다. 찬연한 벚꽃을 뒤에 두고 지나는 이가 들고 선 핸드폰을 함께 바라보며 나란히 섰다. 꽃잎이 하늘거렸다.♣(2026.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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