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을 읽고 / 부명제

이청산 2016. 9. 10. 15:18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을 읽고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을 읽고

부 명 제

(수필가·수필평론가)

 

고달플 때도 그리울 때도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살아올 수 있었다. 그 기다림은 삶의 간난도, 사랑의 신산도 다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 속에서 한 세상 생애가 흘러갔다. 나는 지금 그 세월이 맺어준 열매를 안고 살고 있다. 세상의 고단한 짐들을 벗어버리고 이 한촌을 찾아와 색색 빛나는 풀꽃이며 윤슬 반짝이는 물빛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도 기다림이 준 선물로 알고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 중에서

 

작자의 소명대로라면 그가 누려온 삶은 최적화된 모습이 아니다. 일반인들의 사례를 대입하자면 더욱 그렇다. 치열한 생존방식은 그의 삶에서 누락된 사항인 듯하다. 누려온 생애에 쟁취나 포획 같은 탐욕스런 자세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마을 숲 가장자리에 피어난 상사화 무리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자청한다. 이이러니한 상황이다. 그 같은 고양상태가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낯설다. 냉정히 따져볼 때 그 정도의 풍성이면 인간 탐색의 측면에서 상위포지션에 속한다. 상위포지션하면 UFC 경기 장면처럼 주저 없이 파운딩을 날리거나, 엘보를 찍는 화끈한 맛이 동반되어야 제격이다. 전세를 만회할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생존 법칙이다. 살벌한 케이지(Cage)야말로 삶의 축소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일배는 이 같은 관점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다. 오로지 기다림 하나로 자신을 지탱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할 뿐이다. 지금은 상사화 꽃 대궁이 솟아오르기를 바란다.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왠지 적요하다.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물 빠진 갯벌에 서서 다시 밀물 때를 기다리며 망연자실하는 이가 있다면 어리석다. 도리어 그때가 황금어장인 까닭이다. 갯벌 안에는 낙지, 조개, 짱뚱어까지라도 무궁한 자원이 숨어 있다. 남들처럼 배타고 고기잡이에 전념하지 않아도 살아갈 방도는 이미 확보한 것이다. 단지 생활양식은 담백하게 하고 마음의 양식을 늘리려 노력한다. 그가 원하는 양식은 색색 빛나는 풀꽃이며 윤슬 반짝이는 물빛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도 기다림이 준 선물로 알고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로 강변된다. 이일배의 말의 본성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인 줄 모른다. 그래서 상사화를 표현한 그의 문장은 버성기지 않고 푼더분하다. 상사화를 주제삼은 작품은 많아도 자신의 분위기로 독자의 시선을 끄는 점에서 앞으로 그의 작품을 도외시할 순 없다고 본다.

근대의 문학사조에서 수사학((Rhetoric)은 갈래로 찢겨나가고 경원시하는 경향도 강하지만, 로마시대부터 상류층의 기본교육과목에 반드시 수사학은 논리학, 문법과 같이 3대 필수 교양과목으로 포함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교육전통은 중세, 르네상스를 지나 19세기까지 이어져왔다. 지금에서야 단순히 문장 작성법에 불과하다 쳐도 너무하다 싶게 수사(레토릭)를 도외시하는 수필작가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일배의 문장은 대비된다. 호감을 느낄 만큼 잘 쓰였다는 말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인간사후에 시인과 소설가 혹은 희곡작가 중에 선별하여 신()의 가꾼 정원에 입장이 허용될 것이다. 만일 수필가에게까지 해당된다면 명단에 이일배 작가의 이름도 올라갈 날이 올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이와 미리 악수라도 나누고 싶다. 덕분에 글을 읽는 내내 역설적으로 즐거웠다.                                  

 <대한문학2016가을(통권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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