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

역사 속의 스캔들

이청산 2007. 9. 29. 10:04
‘왕과나’로 보는 역사 속 스캔들 이랬다 [뉴스엔]



[뉴스엔 김형우 기자]

SBS 대하사극‘왕과 나’는 그동안 사극에서 중심적으로 그려졌던 왕권다툼이라는 소재를 버리고 소외됐던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주제로 눈을 돌려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사랑’이지만 사극에서만큼은 너무나도 신선한 ‘사랑’이 있었기에 ‘왕과 나’가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과연 왕과 왕비가 신분 귀천을 뛰어넘는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표한다. 더욱이 일부 시청자들은 삼각관계네, 불륜이네 말하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왕과 나’를 비판하기도 한다.

과연 환웅과 웅녀의 사랑 속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왕과 나’와 같은 애정비화가 얼마나 있을까.

● 고구려 1-2대왕 주몽 유리, 삼각관계에 눈물 흘렸네

만주대륙을 호령한 거대왕국 고구려를 세운 영웅도 사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나보다. 주몽에 관련된 설화에 나오는 두 여인 예씨부인과 여걸 소서노 사이에서 주몽은 늘 ‘흔들흔들’했기 때문이다. 여러 주몽설화의 공통된 점은 소서노가 졸본지역 토착세력의 유력한 지배계급에 32살의 여인이었다. 21살의 주몽보다 무려 11살이나 많았던데다가 일부 설화에선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은 둔 과부였다.

주몽은 이런 소서노와 결혼해 졸본을 배경으로 고구려를 세웠다. 근데 과연 주몽은 이런 소서노를 진짜 사랑했을까? 주몽의 아들인 유리에 관한 설화엔 예씨부인이라는 묘령의 여인이 나타난다. 주몽이 부여에 거주했을 당시 결혼했던 첫 정실부인이며 유리는 이 예씨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찾아 온 유리를 신분 확인 ‘딱’ 한번하고 왕위계승자로 지목했던 점을 감안하면 주몽이 예씨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았음을 방증하고 있다. 물론 주몽에 관련된 스캔들은 말 그대로 설화이기에 역사나 진실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또 주몽이 두 여자 가운데 누굴 사랑했는지도 알 수 없다. 말 그대로 진실은 저 너머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는지 유리도 삼각관계에 마음이 많이 상했다. 유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적어도 유리가 부른 것으로 알려진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라는 황조가는 유리가 처했던 참담했던 삼각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전에 따르면 유리는 두 여자를 후실로 얻었는데 한명은 골천 사람 화희였고 또 한명은 한나라 사람인 치희였다. 두 여자는 처음부터 화목하지 못해 유리는 동궁과 서궁을 짓고 따로이 머물게 했다. 이후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간 사이 화희와 치희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화희가 치희에게 “한나라 종의 딸 주제에 왜 이리 무례한가?”고 따지자 분함을 참지 못한 치희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유리가 말을 달려 쫓아갔지만 치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일을 겪은 후 어느날 유리는 나무 밑에서 쉬다 꾀꼬리 한쌍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지은 것이 바로 이 황조가다.

● 의자왕 첫사랑 닮은 요녀에 흠뻑, 나라도 망쳤다

의자왕과 관련된 스캔들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삼천궁녀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애정비사가 의자왕에겐 존재한다. 물론 정사가 아닌 야사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바이지만 이 스캔들이 사실이라면 ‘남자는 첫사랑을 절대 못잊는다’라는 통설이 역사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것일 듯하다.

금화로 알려진 무녀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의자왕의 전처와 너무나 닮았다는 이유로 의자왕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은고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금화는 용모가 수려하고 자태 또한 아름다운데다 남자를 녹이는 ‘기술’역시 대단하다고 재야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 금화는 신라의 사주를 받은 ‘삼국시대판 마타하리’였다. 성군으로 명성을 날리던 의자왕을 홀려 폭정을 일삼케하고 끝내는 백제를 멸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야사에는 기록돼 있다. 하지만 스파이 운명은 파리목숨이었던가. 신라를 위해 몸까지 버렸던 금화는 백제 멸망과 함께 김유신 측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 이탈리아엔 로미오와 줄리엣, 백제엔 서동과 선화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서동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이 노래는 백제의 서동(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신라 제 26대 진평왕 때 지은 민요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 대단한 스캔들은 한 하늘아래 같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싫어했던 백제와 신라를 한 가족으로 만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서동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처럼 행세하며 신라로 슬며시 들어왔다. 이런 서동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내용의 이 노래를 신라 아이들에게 퍼뜨리게 했고 이 노래를 들은 진평왕은 분노하며 선화공주를 귀양보냈다.

이 때를 놓칠 서동이랴. 귀양간 선화공주를 꼬드긴 서동, 백제의 왕으로 등극하며 선화를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여 ‘여자 꼬시기’는 물론 백제와 신라의 화친까지 이끌어내며 1석2조의 효과를 누렸다.

● 삼촌과 정분난 여자, 진성여왕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유지하던 신라.지금으로 표현하자면 동성동본, 가까운 친인척간의 결혼으로 왕실 혈통을 보존했던 신라였지만 진성여왕의 ‘질퍽한’스캔들까진 눈감아주긴 힘들었나보다.

신라시대 폭군으로 유명한 진성여왕은 삼촌 뻘인 각간 위홍과 사통해 백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무리 친인척의 혼인이 당연했던 신라 왕실이었지만 삼촌과 매일 밤 벌이는 진성여왕의 ‘유흥놀이’를 신라가 망하게 된 근본 이유로 삼을 정도였다. 더욱이 진성여왕은 궁중에 미소년을 끌어들여 음행을 일삼았다고 하니 그녀의 남성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질 잘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 개혁군주 고려 충선왕, 아내 질투에 왕 자리도 �겨나

충선왕은 공민왕과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개혁군주다. 반원정책을 펴고 서민중심정치로 성군으로 추앙받는 충선왕. 하지만 이 충선왕은 원나라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다시 오르기를 밥 먹듯했던 불쌍한 군주이기도 하다.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던 고려는 세자를 원나라로 보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했다. 더욱이 충렬왕 이후 고려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 사위와 아들이 동급이던 몽고 가족 체계에 따라 원나라 왕실의 가족이 됐다. 충선왕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충선왕은 원나라 거주 당시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한 사이.

하지만 충선왕 몸 속에 들끊던 고려의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귀국 후 계국대장공주를 등한시하고 고려 출신 조비를 총애했다. 이에 질투심이 극에 달한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 충선왕을 음해하는 글을 올렸고 결국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에게 왕위를 내놓고 원나라로 소환되는 처지에 놓였다.

● 희대의 폭군 연산군 그 뒤엔 장녹수가 있다!

장녹수는 조선시대 4대요부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연산군의 총희였던 장녹수는 원래 제안대군의 여종이었으나 뛰어난 용모와 가무로 인해 연산군에게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다. 장녹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입궐 후 숙원이라는 꽤나 높은 후궁 신분을 쟁취했다.

하지만 이런 장녹수는 연산군의 국사에 간여하고 헤픈 씀씀이로 재정의 궁핍을 초래해 중종반정이 일어난 한 원인으로 받아들여진다.

● 조선 최고 바람둥이 성종에게 쫓겨나 사약까지 받은 폐비윤씨

폐비윤씨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선은 극과 극이다. 정치암투를 벌이며 온갖 시샘과 질투로 성종을 대하다 결국 ‘만인지상’인 남편 성종의 얼굴에 흠집까지 낸 요녀에서부터 정귀인과 엄귀인 등 후궁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궐내 정치싸움의 희생양으로 성종의 사약을 받은 비련의 여인까지, 폐비윤씨는 역사 속에서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어찌됐건 부인만 12명이었던 바람끼 넘친 성종을 바라보던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게다가 자기 편은 단 한명도 없는 왕궁에서 여인들의 파워게임에 밀려 조선왕조 최초로 폐비 당해 사사까지 당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은 사실. 순서로는 두번째 왕후이지만 폐비를 당해 서열에서도 세번째로 밀리는 수모까지 당한 폐비윤씨는 그녀가 사약을 먹고 피를 토했던 옷 저고리를 본 아들 연산군이 사화까지 일으키게 만든 조용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조선 역사의 커다란 인물이다.

● 아버지와 아들, 한명으론 부족하다. 상궁 김개시

정난정 장녹수 장희빈과 함께 조선 시대 4대 요부로 알려진 상궁 김개시는 아버지인 선조와 아들인 광해군을 두루 섭렵한 대단한 여인네다. 김개시는 원래 선조의 여인으로 후궁에 오를 기회까지 얻었다. 이런 김개시는 선조 사후 힘들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의 눈에도 들어 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상궁이다. 선조가 급사폭붕(갑작스런 죽음)한 이유가 김개시가 지어올린 약밥때문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어찌됐건 아버지와 아들 두 남자로부터 모두 사랑받은 상궁 김개시. 하지만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김개시 역시 요녀로 낙인찍혀 죽음을 당했다.

● 조선 정치 스캔들 대명사 장희빈

조선 왕들 이름은 못외워도 그녀 이름은 절대 잊지 못한다. 유명 여배우들이 한번씩 거쳐가야 하는 연기 관문처럼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삶을 산 희빈 장씨가 바로 그녀다.

궁에 들어와 무수리 생활부터 착실히 시작한 장씨는 숙종의 눈에 띄어 급격한 신분 상승을 이룬다.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장씨는 소의 당시 왕자 균을 낳았다. 1689년 장씨는 후궁 최고 서열인 희빈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엘리트 계층의 최고봉이던 송시열까지 세자책봉 반대이유로 사사시킨 건 장희빈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케하는 사례다. 더욱이 중전이던 인현왕후까지 폐출시키고 자신이 왕후 자리에 오르는 역사상 보기드문 인생 성공 신화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인현왕후 폐출을 후회하기 시작한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킴에 따라 희빈으로 재차 강등됐고 숙종의 사랑이 시들어진 이후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돼 사약을 받았다.

일부에선 장희빈이 일으킨 대담한 정치 스캔들은 장희빈 반대파였던 서인들이 악의적으로 기록해놓은 것에 불과하며 장희빈이야말로 사화가 끊임없이 일어나던 숙종 시절, 역사 풍파에 불쌍하게 휩쓸린 희생양이라고 보기도 한다.

[중앙일보] 2007.09.28 13:35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