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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노래인생 48년

이청산 2007. 9. 21. 11:27
[도올고함(孤喊)] 이미자 노래인생 48년 
          `예술은 희로애락에 정직한 하늘의 성의`
    [중앙일보]                        이미자는 한국의 에디트 피아프
                             그 노래, 트로트 아닌 전통가요
9월 18일 비 내리는 오후 나는 장충동에서 이미자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한국 가요사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월북가수들의 옛 노래를 모아 ‘해금가요’판을 내기도 했다. ‘다방의 푸른 꿈’ ‘잘 있거라 단발령’ ‘어머님 전상서’ 등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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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는 늙지 않는다. 이미자는 노래로서만 모든 것을 말한다. 그녀에게는 노래 이외의 언어가 없다. 그녀의 노래가 곧 그녀의 인생이요, 그녀의 인생이 곧 한국 민중 가요의 역사이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로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1930년 중반에 유행한 대중가요가 있다. 나는 재작년 우리나라 최북단 지역 두만강 건너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이라는 낯선 곳에 갔다가, 그곳에서 이 노래의 사연을 듣고 두만강변을 걸으면서 하염없이 운 적이 있다. 궂은비마저 내려 내 뺨을 적시고 있었다.

이 노래의 작곡자 이시우는 둥베이(東北) 지방의 조선인 부락을 순회공연하던 극단 '예원좌'의 일행이었다. 때는 단풍잎이 짙게 물들어 마찻길을 깔아주던 늦가을, 두만강변 투먼의 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싸늘한 냉기가 솔솔 휘감기는 여관방에 누워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구슬프게 통곡하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문풍지 떨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처량했던지 참을 수 없어 그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몰래 창호지 틈새로 방을 엿보니 한 여인이 소복 입고 촛불 앞에 간략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엎드려 솟구치는 오열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내려가 여관 주인에게 사연을 물었다. 이 여관은 3.1운동 이후 독립군들이 지나치는 거처가 되었던 곳. 이 여인은 항일투쟁으로 집을 떠난 남편의 행방을 찾아 투먼으로 왔다. 드디어 남편이 갇힌 형무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총살되어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밤이 마침 남편의 생일, 그리고 남편은 여관 주인과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빈 방에서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놓고 생일제를 지내려 하였는데 여관 주인이 알아차리고 제물을 차려주었던 것이다.

외국 음악에서 싹튼 한국 대중가요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를 거쳐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1964)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이시우의 가슴에는 나라 잃은 겨레의 슬픔과 한 여인의 처창(悽愴)한 심정이 크나큰 충격으로 밀려왔다. 그 밤중으로 두만강변에 뛰쳐나가 이 노래를 지었다.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여기서 '님'은 흐느끼는 여인의 남편인 동시에, 돌아올 줄 모르는 '조국'이다.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언제나 돌아올까? 잃어버린 나의 조국이여! 님이여!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물론 이 노래는 이미자의 노래가 아니다. 그녀가 태어나기도(1941년생) 전에 유행되었던 노래이지만 그녀의 노래를 이해하는 우리의 마음은 바로 두만강 뱃사공이 싣고 떠나간 그 '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 님의 연속선상에서 칼라빙카와도 같은 이미자의 목청은 2300여 개의 멜로디를 그려냈던 것이다. '엘레지의 여왕'이니 '국민가수'니 하는 표현도 별 의미가 없다. 이미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한국인의 태고적 심성이 울먹이면서 울고 웃게 된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미자의 노래를 듣고 부르며 자신의 삶의 한(恨)을 달랬던 것이다.

-어디서 태어나셨습니까?

"전 서울사람이에요. 지금 한남동 유엔빌리지 자리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철둑길을 넘으면 한강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곳에 솥 걸어서 잿물로 광목 삶아 펄럭펄럭 빨랫줄에 걸고 그 사이를 뛰어놀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해요."

-노래를 어려서부터 잘 부르셨겠죠?

"아버님 친구들이 집에 와서 술상 차리면 유행가를 꼭 부르시는데 다섯 살 난 꼬맹이가 그 다음날이면 가사와 멜로디를 다 외워서 멋들어지게 불렀다고 해요. 소꿉장난하던 친구들도 내가 노래 잘한다고 치켜주면 아무데서나 신나게 잘 불렀죠."

-그러니까 타고난 가수시군요. 데뷔는?

"전 지금은 없어졌지만 마포에 있었던 문성여고를 다녔어요. 고1 땐가 임택근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던 KBS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어느날 용기를 내서 찾아갔죠. 그랬더니 교복 입은 학생은 출연할 수 없대요. 그래서 몇 주를 참다가 사복을 입고 나갔지요. 나애심씨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탱고곡 '언제까지나'를 불렀는데 당당히 1등을 차지했죠. 그 다음날 학교 가면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교문을 들어서자 박수가 쏟아지는 거예요. 기분 좋았죠. 그 뒤로 콩쿠르 많이 나가서 양동이니 양은.스텐 그릇 같은 것을 상으로 많이 받아왔죠."

-정식 데뷔는?

"1958년 가을쯤 KBS 주말 큰 프로였던 '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한 사건을 꼽아야겠죠. 종로 화신백화점 꼭대기 카바레에서였죠. '빨간 마후라'를 작곡하신 황문평 선생 밑에서 레슨받고 있었는데, '빨간 구두 아가씨'를 부른 남일해씨가 찾아왔어요. 나화랑 선생의 심부름이라면서 절 옥인동으로 데려갔어요. 나화랑 선생은 당시 KBS관현악단장이고 사계의 거물이었죠. 가슴이 울렁거렸죠. 드디어 때가 오나 보다. 저를 보시자마자 바로 다섯 곡을 주시면서 내주 KBS 공개방송에 출연하래요. 전 열일곱 소녀였어요."

-첫 레코드에 취입한 '열아홉 순정'이니 '집시의 여정'이니 하는 곡들부터 다 트로트로 분류되는 곡입니까?

"'열아홉 순정'은 스윙이고 '집시의 여정'은 볼레로예요. 그런데 제발 절 '트로트 가수'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전 트로트 가수가 아녜요. 트로트란 박자의 리듬 때문에 생겨나는 장르의 이름이겠지만 제 노래가 다 4분의 2박자일 리도 없고, 요즈음 트로트라는 것은 단순하고 빠른 템포의 댄스 배경곡으로 비하된 천박한 노래들입니다. 제 노래는 결코 트로트로 분류될 수 없습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바로 대중가요고 민중가요고 전통가요의 전부일 뿐이었어요. 트로트라는 장르 의식이 없었어요."

-가야금곡을 만드시는 황병기 선생께서 백제 음악의 원류를 추구하시다 보니까 백제 음악이 원래 4분의 2박자의 단순한 트로트 리듬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셨답니다. 그러니까 일본 엔카(演歌)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 조선인의 리듬이 일본 역사 속에서 속화된 것이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 노랫가락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런 뿌리로부터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여튼 트로트 리듬은 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밖에는 없어요. 이태리에 팍스 트로트(fox trot)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스윙에 가까운 것이죠.

"어떤 근사한 설명을 해도 전 제 노래를 트로트로 분류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절 뽕짝 가수로 취급하지 말아달란 말예요."

이미자는 이 대목에서 너무도 단호했다. 사실 그녀 말은 맞다. 그녀의 노래는 단순한 4분의 2박자가 아닌 매우 품격 있는 리듬을 과시하고 있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오묘한 싱코페이션이 깃들어 있다.

-그렇지만 이미자의 노래는 왜색 가요로서 긴 세월 금지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씀 하시면 가슴에 맺힌 한을 다 말할 수 없군요. 결코 내 노래가 왜색이라서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레코드 회사 사이의 싸움이 주 원인이었죠. 제 레코드가 너무도 많이 팔렸는데 그 당시 LP판은 온 직원이 다 동원되어 찍어대도 하루에 천 장 이상 찍을 길이 없었는데, '동백아가씨'는 1년에 100만 장이나 팔렸죠. 그런데 전 지구레코드사 전속이었거든요. 그런데 설상가상, 제 노래를 사랑하시다 못해 오아시스 레코드사 전속이셨던 박춘석 선생까지 지구레코드로 적을 바꾸신 겁니다. 당시 오아시스는 막강했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오아시스 입김으로 제 곡들은 65년부터 금지곡으로 방송 불가가 되었고, 나중에는 음반 발매까지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72년 훗날 일본 수상이 된 후쿠다 외상(현 후쿠다 야스오의 부친)이 방한해서 청와대에서 만찬이 열렸죠. 제가 영빈관에 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박 대통령께서 '동백아가씨'를 부르라고 지정하시는 거예요. 그분은 제 노래가 금지된 것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2300곡이나 부를 수가 있었습니까?

"60, 70년대는 드라마나 영화 주제곡이 많았죠. 제 노래가 들어가야 영화가 히트를 쳤고, 판도 제 노래라야 잘 팔렸으니까 저에게 딸린 작곡가만 해도 20여 명이 되었죠. 그분들이 번갈아 주는 노래를 부르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죠. 한 판에 12곡 정도 들어가니깐, 피아노 몇 번 맞춰보고 그냥 취입하는 거예요."

-목청이 과로를 당해내나요?

"목이 쉬어서 못 부를 때도 많아요."

-벌써 60 중반을 넘어가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그렇게 청초한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까? 건강 비결은?

"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리고 평생 술.담배를 전혀 못했어요. 그래서 목이 걸걸하게 되지 않았죠. 그리고 남편 출근시키고 애들 학교 보내고 시부모 모셔야 했기 때문에 전날 어떤 무리를 했어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 규칙생활을 했어요. 웰빙 걱정하고 운동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가수의 목소리만은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후천적 노력의 세계가 아니죠."

-'하느님께서'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종교적 신앙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 예술세계에서는 종교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희.노.애.락의 감정에 정직할 뿐입니다. '하느님 맙소사'할 때의 자연스러운 하느님 이상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대 노래의 비결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가사에 배어 있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해야 합니다. 가사가 곧 나의 생명의 맥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도 소홀하면 안 됩니다. 전 예술은 성의(誠意)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자는 평생 대중가수라는 이유만으로 천대받았던 많은 설움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한때 내 문하에서 공부했던 아들 용민(容民)군이 영국 엑시터대학에서 정치학박사 논문 디펜스를 성공적으로 해낼지를 걱정하고 있는 평범한 엄마다. 나 도올도 정말 대중가요에 관해선 할 얘기가 많다. 이제 우리 사회가 대중문화의 거성들을 존중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란서인들이 에디트 피아프를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도 이미자를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자는 오는 10월 12~14일 신당동 충무아트홀에서 가요 48년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

도올 김용옥 ,사진=임진권 기자

2007.09.21 04:57 입력 / 2007.09.21 06:16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