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손명현(孫明鉉)


1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은 실천(實薦)의 문제(問題)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의 말대로 실천 궁행(實踐躬行)하지 않는 한(限) 천만 어(千萬語)를 나열(羅列)한다 해도 대답(對答)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한 말로,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으로 믿어 온다. 그러나, 옛날의 웬만한 유생(儒生)들이라면, 이 정도(程度)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특히 공자의 말이 그 대답으로 믿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공자의 실천 궁행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수년 전(數年前)에 나는 오대산(五臺山)엘 간 일이 있다. 거기에는 유명한 고찰(古刹) 월정사(月精寺)와 상

원사(上院寺)가 있다. 그런데, 월정사는 불탄 뒤에 새로 지었기 때문에 옛 모습을 볼 길 없었으나, 상원사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이 절이 전란(戰亂) 속에서도 그대로 남게 된 연유(緣由)를 들었다.

상원사는 방한암(方漢巖) 선사(禪師)가 주지(住持)로서 생명(生命)을 마친 곳이다. 6․25때였다. 국군(國軍)은 남침(南侵)하는 침략군(侵略軍)을 격퇴(擊退)하여 북상(北上)했다가, 중공군(中共軍)의 개입(介入)으로 후퇴(後退)하게 되었다. 그때, 국군은 이 두 절이 적군(敵軍)에게 유리(有利)한 엄폐물(掩蔽物)이 되기 때문에 작전상(作戰上) 불태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處地)에 있었다. 그래서, 국군은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로 가 스님들을 피하라고 했다. 방 선사(方禪師)는 며칠 동안의 유예(猶豫)를 청했다. 그 동안 선사는 스님들을 모두 하산(下山)시키고 혼자 남았다. 약속(約束)한 날에 국군이 가 보니, 선사는 의자에 단좌(端坐)한 채 절명(絶命)해 있었다. 그 장엄(莊嚴)한 광경(光景)을 본 국군은 그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상원사는 남은 것이다.
작전(作戰)하는 처지에서 보면, 절을 수호(守護)한 선사(禪師)에게나 절을 불태우지 않은 군인(軍人)들에게나 우리는 다 같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념(信念)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도(賭)한 선사의 높은 행동(行動), 그리고 비록 군인으로서는 잘못이라 할지라도, 그 높은 행동 앞에 옷깃을 여미고 떠난 그 군인들의 가장 인간적(人間的)인 행동은 우리에게 큰 감명(感銘)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암시(暗示)를 줌에 족하지 않은가.
내가 어려서 읽은 오봉(吳鳳)의 이야기도, 생각할 때마다 이런 감명과 암시를 준다. 옛날, 타이완[臺灣]의 산간(山間)에는 사람의 목을 베어 제사(祭祀)를 지내는 풍습(風習)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리산(阿里山)의 토인(土人)들은 다른 데 사는 토인들보다 앞서 이 악습(惡習)을 없앴는데, 그건 오봉이란 사람의 살신(殺身)한 결과(結果)였다.
오봉은 중국(中國)에서 건너간 선교사(宣敎師)로, 아리산 토인들의 교화(敎化)에 힘썼는데, 나중에는 그들의 추장(酋長)으로 추대(推戴)되었다. 토인들은 오봉을 하느님같이 숭배(崇拜)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 악습을 버리자는 말은 듣지 않았다. 오봉은 하는 수 없이, 내년(來年)에는 허락(許諾)할 테니 금년(今年)만은 참으라고 했다. 그래서, 1년을 무사(無事)히 지냈다. 그리고, 다음 해도 그렇게 해서 또 1년을 넘겼다. 그러나, 3년째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란(叛亂)이라도 일으킬 기세(氣勢)였다. 그 때 오봉은, 그들에게 아무 날 아무 때 아무 곳에 가 보면 붉은 모자를 쓰고 붉은 옷을 입은 나그네가 지나갈 것이니, 그의 목을 베어 제사(祭祀)를 지내라고 했다. 토인들은 좋아하며 그 날 그 때 그 곳으로 가 보니, 추장(酋長)이 말한 대로 그런 나그네가 있었다. 이에 그들은 아무것도 살피지 않고 그의 목을 베고 보니, 그가 바로 하느님처럼 숭배(崇拜)하고 따르던 오봉이 아닌가.
그들은 대성 통곡(大聲痛哭)하고, 재래(在來)의 악습을 청산(淸算)했으며, 그 후로 오봉의 기일(忌日)이 되면 붉은 옷을 입고 그의 덕(德)을 추모(追慕)한다는 것이다.
오봉의 행동이 최선(最善)의 길이었던가에 관해서 서로 다른 의견(意見)이 나올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펴고자 생명을 초개(草芥)처럼 버린 그의 거룩한 행동은, 우리에게 큰 감명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암시를 줌에 부족(不足)함이 없을 것이다.
3
인류 역사(人類歷史), 아니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만 보아도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분들을 허다(許多)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그 반대(反對)의 경우(境遇)도 찾아 볼 수 있다. 군자(君子)는 의(義)에 민첩(敏捷)하고, 소인(小人)은 이(利)에 민첩하다고 하거니와, 우리가 위에서 제기(提起)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도, 결국은 군자의 길을 걸을 것인가, 소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귀결(歸結)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천만 마디로 대답한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所用)이 있는가? 방한암처럼, 오봉처럼 실천(實踐)하지 않는 한……. 

 

 

※ 상원사와 방한암 선사

 '일제의 기세가 내리막길을 걷던 1942년, 경무국장 이케다(池田 淸)가 총독
부와 업무협의 차 현해탄을 건너온 길에 오대산의 한암을 찾았다. 한암을
설득, 불교계의 협력을 얻기 위한 속셈이었다. 이케다는 절을 올리기가 무
섭게 한암의 속내를 떠보았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한암 곁의 시자들 얼굴은
순식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덫을 놓은 이케다의 표정도 심각했다. 일제가
이긴다고 하면 아첨의 말이 될 것이고, 진다고 하면 앞으로 닥칠 핍박과
수난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방안을 꽉 채웠다. 한암은 그러나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결코 임
기응변의 답이 아니었다. 이케다는 말문이 막혔다. 이 한 마디에 정신이
아득해진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산문을 나왔다. 백척간두(百尺竿頭), 한
암의 상황이 그랬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한걸음 더 나아가 벼랑아래로 몸을 던질 줄이야.
한암의 힘이었다. 고려의 나옹(懶翁)은 수행의 한 극점을 현애살수(懸崖撒
手)로 표현했다.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손을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한암의
힘은 바로 그런 수행에서 나온 것이리라.

한암이 말한 덕은 정의까지 포함한다. 덕은 한암의 오도적 세계를 이해하
는 키워드다. 덕은 불교적 언어로 무위심(無爲心)이다. 한암을 연구해온
김호성(金浩星) 동국대교수는 “삶의 괴로운 현실은 부덕에서 비롯되며 덕
을 베풀 때 세상은 바로 선다. 사람들이 자비를 실천할 줄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위심(有爲心ㆍ차별 또는 인연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비의 실천을 가로막
고 있는 것이다. 무위심을 닦으면 자비심의 발로는 저절로 이뤄진다는 게
불교적 사유다”고 말한다. 한암선의 특징을 무위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암중원(漢岩重遠ㆍ1876~1951), 그를 사문의 길로 이끈 단초는 ‘반고씨
(盤古氏)’였다. 부친은 한학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9세 때 서당에
서 사략(史略)을 읽던 중 ‘태고에 반고씨가 있었다’는 구절에 의문을 품
게 된다.

그렇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의문을 간직한 채 성장
한 그는 21세 때 금강산 유람에 나선다. 그리고 삭발을 결심한다.

금강산 장안사 행름(行凜)에게 출가한 그는 3번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을
밟는다. 출가하던 해 신계사에서 보조(普照)의 수심결을 읽다가 초견성(初
見性)의 법열을 맛본다. 한암은 이후 경허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경허는
바람이었다. 숨바꼭질 하듯 경허를 찾아 전국을 떠돈지 2년 만에 경북 성
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극적인 첫 대면을 한다. 한암은 어느날 경허의 금강
경 설법을 듣게 된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을 비상(非相)이라고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이 구절을 듣고 “안광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눈에 우주 전체가 훤히 들여
다보였으며 듣고 보는 것이 모두 나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고 한암은 두
번째 깨달음의 순간을 적었다. 경허는 “한암이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어
섰다”고 인가한다.

‘남 만공(南 滿空) 북 한암(北 漢岩).’ 경허의 소멸이후 한국불교를 이
끌어간 둘의 위상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만공은 충남 수덕사, 한암은 강원
상원사를 중심으로 일방의 종주가 됐다. 경허선의 세계에서 둘의 위치는
각별하다. 무엇보다 한암은 스승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지성과 안목이
탁월했다.

수제자 만공이 1930년 스승의 생애를 정리하는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
鏡虛和尙行狀)의 집필을 한암에게 맡긴 이유도 다 그런데 있다. 경허는 1
900년 겨울 해인사에서 한암과 해후, 한철을 함께 보낸 뒤 전별송을 짓는
다. 경허는 이 무렵부터 잠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허는 전별송에
서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고 적
고 시 한수를 덧붙인다. 성행이 질박하고 학문이 고명한 후학을 만난 스승
으로서의 기쁨과 애정의 표시였다.

북해에 높이 뜬 붕새의 날개 같은 포부(捲將窮髮垂天翼ㆍ권장궁발수천익)
변변찮은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謾向槍楡且幾時ㆍ만향창유차기시)
이별이란 예사라서 어려울 게 없지만(分離尙矣非難事ㆍ분리상의비난사)
뜬 세상 흩어지면 또 다시 언제 보랴(所慮浮生杳後期ㆍ소려부생묘후기)

스승의 심정을 헤아린 한암도 답시를 쓴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霜菊雪梅纔過了ㆍ상국설매재과료)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 없을까요(如何承侍不多時ㆍ여하승시부다시)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있는데(萬古光明心月在ㆍ만고광명심월재)
뜬 세상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습니다(更何浮世謾留期ㆍ갱하부세만유기)

한암은 평북 맹산 우두암에서 보림을 하다 계오(契悟ㆍ깊은 깨달음)를 이
룬다. 서른 넷의 나이였다.
“스님은 오도송에서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 홀연히 눈이 밝았으니/ 이로
좇아 옛길이 인연 따라 맑네/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 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런데 글 끝의 ‘岩下泉鳴不濕聲(암하천명불습성)’이 어떻게 조사의 뜻이
될 수 있습니까.”
“네 뜻이 아닌 고로 조사의 뜻이니라.”
“스님께서 속서에 능하다는 사실을 익히 들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수행인이라고 잘못 부를 뻔했구나.”
한암이 상원사에서 수좌 운봉(雲峰)과 나눈 법담이다. 비수를 품은 듯한
험구의 교환이다. 운봉이 조실 한암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자
한암은 “이 밥도적아”하는 투로 맞받아친다. 한암은 제자들의 파격적인
도전도 마다 않고 수용, 저마다 근기에 맞게 지도했다. 그의 문하에서 효
봉(曉峰) 탄허(呑虛) 동산(東山) 보문(普門) 등 숱한 거목들이 배출된 것
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경봉(鏡峯)과는 서로 호형 호제하며 깊이 사귀었다.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 한암이 봉은사 조실 자리를 털고 상원사로 들어가면서
시자 용명(龍溟)에게 들려준 말이다. 한암은 다시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간
것이다. 한암은 1941년 조계종의 첫 종정에 추대된다. 31본산 주지들은 한
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총본산을 두기로 결정한다.

종명(宗名)은 권상로 등 당대 석학들에 의뢰, 조계종으로 정했다. 한암은
“중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 하였거늘 나 같은 늙은 중에게 감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명리에 초연한 수행자였다.

● 연보
▲ 1876.3.27 강원 화천출생, 속성은 온양 방(方)씨,법호 한암, 속명 중암
▲ 1897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 수심결 읽다 1차 개오
▲ 1899 성주 수도암에서 경허의 설법 듣고 2차 개오
▲ 1910 평북 맹산 우두암에서 3차 개오
▲ 1926 오대산 상원사 주석
▲ 1931 경허의 행장 편찬
▲ 1941.6.4 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받아 광복 때까지 역임
▲ 1951.3.22 세수 75, 법랍 54세로 좌탈입망 

[출처] 상원사와 방한암 선사|작성자 여여막

 

 한암스님이 ‘좌탈입망’ 한 직후 모습. 

 

方漢岩 禪師

 

                    - 서정주

 

난리 나 중들도 다 도망간 뒤에

노스님 홀로 남아 절마루에 기대앉다.

 

유월에서 사월이 왔을 때까지

뱃속을 비우고

마음 비우고

마음을 비워선 江南으로 흘려 보내고

죽은 채로 살아

비인 옹기 항아리같이 반듯이 앉다.

 

먼동이 트는 새벽을 담고

비인 옹기 항아리처럼 앉아 있는 걸

收復해 온 병정들이 아침에 다시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