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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이 본질을 뒤흔드는 세상

이청산 2011. 8. 1. 11:58

껍질이 본질을 뒤흔드는 세상

  • 성석재 소설가
  •  입력 : 2011.07.31 22:32 [조선일보]

피부만 봐서는 나이 알 수 없고 남녀노소 얼굴에 주름 찾기 힘들어
먹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모두 겉만 번지르르한 세태의 반영
외양과 내면의 균형 되찾아야 우리 삶의 의미도 되살아난다

요즘 사람들은 피부만 보아서는 나이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소녀와 꽃미남을 내세운 대중문화의 총아인 가수들이 젊다 못해 어려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들에게 열광하는 부모뻘 나이의 아줌마 아저씨들 또한 예전에 비하면 10년은 젊어 보인다. 어릴 적 사립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면 천명(天命)이 뭔지 어렴풋이 알게 된 나이에 장죽을 허리춤에 꽂고 손자를 안고 나온 할아버지들이 마을 길을 소요하곤 했다.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굵은 주름은 경험과 지혜의 징표였다. 하지만 요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굴에서 주름 보기가 쉽지 않다. 성형술, 화장술, 영양공급과 관리기술이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발달하다 보니 그럴 것이다.

한 사람의 외양, 피부와 외모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인 양 숭상하고 찬송하는 오늘날의 풍속은 인류 역사상 미증유(未曾有)의 것이지 싶다. 이제 관리하지 않은 외모와 피부가 사회적 약자의 상징처럼 바뀌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모두 겉만 번지르르하고 피상적일진대 이렇게 되지 않는 게 이상한 게 아닐까.

우리가 요즘 먹는 음식은 재료를 여러 번 가공해서 보기 좋고 먹기 쉽게 만든 것이다. 뇌리 깊숙한 곳을 뒤흔드는, 추억과 감동이 함께하는 깊이 있는 맛이 아니라 누구나 아무렇게나 배를 채우고 말면 그뿐인 것들이 많다. 언론, 특히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과장되게 떠받들어진 음식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전문가의 감식안을 빌린 것이라고 해도 결국 자신이 직접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깊은맛이 아니라 피상적인 선입관으로 포장된 음식이다. 몇 번 먹지 않아서 질릴 수밖에 없다.

또 글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말 잘하는 사람이 인기를 끌고 숙고(熟考)와 지혜에서 나온 문장보다는 자극적이고 부박(浮薄)한 유행어가 쉽게 받아들여지고 퍼진다. 말은 글보다 피상적이다. 말이 아무리 매끄럽고 듣기 좋다고 해도 생각이 오래 머물 수 없다. 이메일은 편지보다 피상적이다. 공장산 제품은 수제품에 비할 수 없이 피상적이다. 인터넷 속의 뉴스는 신문 지면의 뉴스에 비해 피상적이다. LCD 화면은 스크린보다, 스크린은 무대보다 피상적이다. 고속도로는 4차선 국도보다, 4차선 국도는 2차선 지방도보다 피상적이다. 빨리 가다 보면 자신이 가는 길 주변의 풍경을 마음에 담거나 그 풍경의 세부를 관찰하거나 풍경에서 위안을 얻을 겨를이 없다.

그렇다고 이런 시속(時俗) 자체가 모두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예쁘게 만드는 기술, 포장과 유통 과정에서 일자리가 생기고 이윤이 창출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껍질과 외양 때문에 본질이 흐려지고 본말이 전도될 때가 문제다.

우리의 몸과 정신, 감각기관과 뇌는 수백만년 동안 자연스러운 진화 속도에 적응하며 외양과 내면의 균형을 갖춰왔다. 인류의 스승들은 유한한 삶과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부박함과 피상성을 배격하라고 가르쳤다. 뛰어난 예술가들에 의해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감동을 맛보았다. 인간 이상(以上)의 어떤 존재에 대해 경배하고 인지(人智)로는 알 수 없는 신비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수십 년, 아니 몇 년 사이에 껍질과 외양이 주인인 문화가 판을 치게 됐다.

겉만 번지르르한 껍질은 우리의 시선을 쉽게 끌어당길 수는 있지만 겉이 미끄러운 만큼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게 할 수 없다. 달콤하고 자극적인 맛은 금방 입맛을 지치게 한다. 감각에만 영합하는 빛깔·소리·향기로 만든 상품은 일시적 인기를 끌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경쟁자가 사방에 널려 있으니 그들끼리의 미친 듯한 경쟁은 인생에 관한 통찰, 감동적인 예술이 깃들 터전마저 잠식하고 지력을 고갈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영혼의 밭에 박히는 삽날 같은, 우리 각자의 존귀함을 깨닫게 할 고전을 가까이하고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를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역설적으로 커지고 있다. 껍질과 본질의 균형을 되찾는 것은 우리 삶의 의미를 찾아오는 것과 같다. 피상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피상적인 음식을 먹고 마시고, 피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말초기관을 일시적으로 만족하게 하는 소비적 문화를 탐식하다 보면 확실히 시간은 빨리 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겉은 젊은 채 옛사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인생의 종착점에 이르게 되면, 그때 가서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은 킬링 타임용 영화가 아니며 다시 상영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