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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난했던 형제들

이청산 2008. 12. 1. 00:40

[김진 시시각각] 대통령의 가난했던 형제들 [중앙일보]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어린 시절 가난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나오면 집안 전체가 드라마틱한 신분상승의 유혹에 빠지곤 했다. “내 형(동생)이 대통령인데…”라는 권력최면에 걸리는 것이다. 스스로가 정신을 차리려 해도 주변에서 이들을 최면으로 몰고 간다. 최면에서 깨어나는 게 불행을 막는 생명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난과 시련의 추억이 이성(理性)을 덮는 경우가 있다.

소년 전두환의 가족은 1939년 일제의 등쌀을 피해 합천 시골을 떠나 만주로 갔다. 가난도 가난이지만 더 두려운 것은 마적단이었다. 40년 10월 젖먹이 막내아들 경환이 심한 열병을 앓았다. 마적단이 지린(吉林)성 마을을 덮쳤다. 온 마을 사람이 쑥대밭으로 피했다. 경환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울음을 막으려 했으나 경환은 더욱 세차게 울어댔다. “까딱하면 우리 모두 죽고 말 거요. 이 끈으로 목을 졸라요.” 어둠 속에서 시커먼 손이 뻗쳐왔다. 소년 두환에게 이 일은 공포스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작가 천금성이 지은 전두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

 전두환 대통령은 11살 아래인 막내 경환을 예뻐하고 끌어주었다. 70년대 자신이 경호실 실세일 때 동생을 경호요원으로 밀어주었다. 80년대 초 전두환 권력이 등장하면서 전경환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사무총장·회장, 사회체육진흥회장 등을 맡았다. 결국 전경환은 5공 비리의 대표적인 인사로 사법처리됐다. 형님 대통령은 88년 11월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백담사에 은둔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봉하마을의 손바닥만 한 방에서 형제들과 자랐다. 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막내인 내겐 아주 든든한 두 형님이 계셨다. 인근 마을까지도 우리 큰형님 말고는 대학생이 한 명도 없었고 작은형은 손재주가 좋았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청년 노무현은 어망 회사를 잠깐 다니다 그만두고 진영 고향으로 내려간다. 작은형(건평)이 실직해서 쉬고 있어 집안 사정이 어려웠다. 무현은 형 건평과 함께 마을 건너 산에다 토담집을 짓기로 했다. 둘은 산에 가서 구들도 직접 떠 나르고 돌도 주워 날랐다. 밤에는 남의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 서까래를 올렸다. 그 토담집에서 무현은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건평과 함께 지은 토담집이 없었다면 판사 노무현도, 대통령 노무현도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후 형 건평을 괴롭힐 유혹의 손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형에게 돈을 주고 연임을 청탁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을 공격했고 남 사장은 투신 자살했다. 건평씨는 지금 인척·측근 비리 스캔들의 한복판에 놓여 있으며 노무현 정권의 도덕성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노 대통령은 유혹의 그림자를 간파했으나 결국 막지 못했다. “다 큰 형을 어떻게 단속하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림자가 짙은 만큼 좀 더 철저히 경계선을 쳤어야 했다. 청와대 민정팀과 관련 부처가 더 촉각을 세웠어야 했다.

 2001년 작고한 육인수 전 공화당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처남이다. 그는 생전에 박 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다며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61년 혁명 후 박 대통령이 최고회의의장이 된 지 얼마 안 있어 고향 상모리에서 농사를 짓던 큰형님 박동희씨가 찾아왔더래요. 큰형님은 ‘고향 사람들이 나더러 이제는 나라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며 몇 가지 사업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박 대통령이 사람을 시켜 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권 사업이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큰형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형님, 알겠습니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형님은 내려가서 농사일을 계속 하시죠’라고 했대요. 박 대통령은 형님이 내려가자마자 고향 경찰서에 지시해 형님댁 앞에 보초를 세우도록 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의 사후(死後), 비리 얘기는 없다.

[2008.11.30]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