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 7

나무는 그저 산다

나무는 그저 산다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늘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모습이 다르다. 산을 덮고 있는 나무의 빛깔이며 모양이 볼 때마다 새롭다. 저 둥치 줄기 어디에다 고갱이를 간직해 두었다가 철 맞추고 때에 맞추어 이리 새 모습으로 바꾸어내는 것일까. 엊그제만 해도 맨살 가지에 겨우 움이 트는가 싶더니 연둣빛 애잎이 돋고, 파릇한 새잎이 어느새 현란한 푸른 잎이 되어 가지를 감싸고 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라도 할 양이면, 그 빛깔이며 모양이 바뀌고 달라지는 모습이 고속 영상처럼 빠르게 피어날 것 같다. 연둣빛 푸른빛이라 하지만 눈여겨보면 나무마다 빛깔이 조금씩 다 다르다. 여리고 진하기도 다르고, 밝고 어둡기도 다 다르다. 빛깔뿐만 아니라 크기도 문채도 같은 게 없다. 둥글고 모진 것..

청우헌수필 2022.05.09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봄이 무르녹고 있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고 있다. 맨 먼저 봄을 싣고 온 생강나무와 진달래는 노랗고 붉은 꽃을 내려놓고, 새잎을 수줍게 돋구어내고 있다. 겨우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감태나무 마른 잎은 새 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가지를 떠난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씨앗이 땅속에 들었다가 새싹이 되어 세상으로 눈을 내미는 것도 있을 것이다. 큰 소나무 아래 조그만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에 혹은 재작년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고 자란 나무들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산다. 큰키나무도 있고, 떨기나무도 있다. 바늘잎나무도 있고 넓은잎나무도 있다. 늘푸른나무도 ..

청우헌수필 2021.04.19

삶을 잘 사는 것은

삶을 잘 사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있다. 흘러가면서 남긴 자취가 내 안에 쌓여간다. 누가 불러서 오는 것도 아니고, 등을 밀어서 가는 것도 아닌 게 세월이지 않은가. 그렇게 자연으로 흘러오고 흘러가면서 굳이 자취를 남기는 세월이 가시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쌓이는 세월의 자취가 몸피를 더해간다 싶을수록 그 자취에 남은 세월이 이따금 돌아 보인다. 돌아보아 따뜻하고 즐거운 일만 있다면야 얼마나 아늑한 일일까. 그렇지 않은 일이 돌이켜질 때면 아린 마음을 거두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어느 날 서가를 뒤지다 보니 오래 손길이 닿지 않아 머리에 먼지가 까맣게 앉은 책이 보였다. 언제 적의 책인가 싶어 빼어보니 이십여 년 전에 산 것이다. 뒤쪽 속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ㅇㅇ년ㅇ월ㅇ월 ㅇㅇ와 함께 서울역에서..

청우헌수필 2020.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