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댑싸리 전설(3)

이청산 2025. 5. 11. 10:50

댑싸리 전설(3)

 

  댑싸리가 이제 새로운 생애를 시작한다. 지난가을 붉게 타오른 뒤 겨울 들면서 씨를 담뿍 떨어트려 놓고는 그대로 말라 갔다. 한생을 다해가는 모습이다. 마른 채로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가 봄을 맞았다.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생애의 자리를 비켜나게 해야 한다. 아내가 씨 뿌려 나게 한 그 생명체들을 다시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른 것들을 들어내었다. 그 자리에는 씨앗들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씨앗들이 앉은 자리를 다치지 않게 천천히 힘주어 살며시 들어냈다.

  봄이 익어갔다. 강둑의 왕벚나무며 뒷산의 산벚나무가 피고 지고 할 무렵 제 전생이 비켜난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들이 꼬물꼬물 솟아났다. 아내가 뿌렸던 그 씨앗, 그 생명체들이다. 윤회의 바퀴를 돌고 돌아 또다시 명을 얻어 태어난 것들이다.

  복스러운 모습을 보려 했을까, 약재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무슨 약으로도 쓰려 했을까? 씨를 뿌려 놓은 아내는. 그것들이 땅 위로 앙증한 얼굴을 내밀 무렵 치병을 위해 아이들이 있는 대처로 떠났다. 아기 손가락만큼 자랐을 때 아내는, 한데만 오물오물 몰려있게 하지 말고 고샅에 한 줄로 나란히 옮겨 심어 쑥쑥 자라게 해 달라 했다.

  옮겨 심었다. 잘 자라났다. 아내는, 그것이 자라 복슬복슬 귀여운 자태를 짓는 것도, 망울망울 눈곱 꽃을 다는 것도, 무슨 애틋한 사연 담아 정염을 불태우듯 하는 그 홍염도, 다음 생을 기약할 자잘한 씨앗을 송송 맺는 것도 보지 못했다.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올 댑싸리도 아내가 옮겨 심어 달랄 때만치 자랐다. 그 모습이 다시 온 것이다. 불도에서는 윤회의 과정을 생유, 본유, 사유, 중유 등 사유四有로 나눈다 했다. 생유生有는 전생의 업력을 받아 이승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본유本有는 태어나 생로병사의 갖은 일 겪으며 일생을 사는 동안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지금 댑싸리는 생유를 얻어 세상에 나와 바야흐로 본유를 시작한다. 그때 아내가 그렇게 해달라 한 것처럼, 올해도 뿌리를 갈라서 한 줄로 나란히 옮겨 심었다. 아내의 손길로 얻은 전생의 업력을 물려받아 난 것들을 보는 감회가 아리다.

  이렇게 본유를 열어가지만, 또 안고 가야 할 생애의 일들이 남았다. 무상한 시간들 속에서 바람 불면 바람 맞고, 비 내리면 비 맞고, 어디 탈이라도 나면 아프기도 하고, 푸르고 붉은빛으로 색깔도 바꾸어 가다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마침내 사유死有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고,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중유中有에 들어야 한다.

  이 댑싸리야 무엇을 더 그리랴. 무럭무럭 자라기만 하면 된다. 자라다 보면 꽃이 피고 다음 생을 기약할 씨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푸른 빛을 벗고 붉은 물도 들 것이다. 물이 붉게 들면 그 빛깔에서 다시 한번 아내를 보는 건 나의 몫이다. 아내의 애틋한 마음일 것도 같고, 나를 향한 노원怒怨일 것도 같은 그 빛깔이다.

  저야 무엇을 알까. 푸르면 푸른 대로 살고, 붉으면 붉은 대로 살면 된다. 붉은빛도 바래면 그냥 해맑은 빛으로 지내다가 달고 있던 씨앗을 떨어뜨리면 된다. 그 씨가 곧 저의 중유가 되고 다시 생유를 얻어 새 세상의 빛을 맞이하면 되지 않으랴. 저에게 얽히고설킨 사연이야 저는 몰라도 된다. 아내의 일도, 나의 일도 다 몰라도 된다.

  댑싸리는 이제 새로운 생애를 아리땁게 시작하고 있지만, 저에게 전생을 준 아내는 이미 사유며 중유를 다 지나 오히려 탈속의 평안을 누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 평안을 누리고 있을까. 아내는 갖은 마음을 다해 가족을 껴안았지만, 나는 이따금 아내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원망을 안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본유의 긴 터널 속에서 생로生老의 굽잇길을 돌고 돌아 지금 출구 쪽을 비쳐드는 노을빛을 안으며 병고를 보듬고 있다. 이제 나아갈 곳은 사유 세상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을 더 바라랴. 그 세상으로 가면 아내가 맞아줄까.

  올해도 댑싸리는 잔잔한 잎새를 보들보들 날리며 푸르러지다가 어느 날 때가 되면 터놓을 심사가 많기라도 한 듯 눈 아린 선홍빛으로 타오를 것이다. 그러고는 수많은 씨앗을 지상으로 내려 앉힐 것이다.

  한 줄로 나란히 심어놓은 이 댑싸리를 보는 내 아릿한 마음은 돌아보지 않을지라도, 아내가 그리고 바라기도 했을 복슬복슬 푸르러질 모습이며 약으로 유용할지도 모를 저것들을 사랑스레 안아주면 좋겠다. 내가 그리는 마음같이 안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아늑한 품이 되면 좋겠다. ♣(2025.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