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칼럼

[신문 칼럼] 앙코르제국은 어디로

이청산 2007. 1. 19. 11:36

 

대일산필(이일배)
앙코르제국은 어디로

캄보디아 방문 이틀째, 한 때 번성을 누리던 앙코르제국(802~1431)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앙코르톰과 앙코르와트를 찾아간다. 사방에 4개의 거대한 얼굴을 새긴 23m 높이의 앙코르톰 남문을 통과한 뒤, 우리나라 아시아 자동차 버스를 타고 밀림 속을 한참 달려서야 사원에 닿았다. 9세기 초 크메르를 통일한 앙코르 왕조의 시조 자야바르만 2세는 힌두교의 최고 신 비슈누를 자처하며 거대한 왕도 앙코르톰을 세우기 시작하여, 300여 년 뒤인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완성을 보게된다. 한 변이 3.2km인 정방형 성채 아래 폭 100m, 수심 6m의 해자를 두르고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한가운데의 바이욘 사원은 직경 25m, 높이 43m의 중앙탑을 중심으로 54개의 탑에 216개의 관음상을 새겼는데, 1t이 넘는 통돌 60만 개를 태국, 베트남 등에서 배와 코끼리로 실어와 지었다고 한다. 회랑의 벽마다 벽화를 새기고, 2m가 넘는 얼굴을 조각한 214개의 얼굴탑을 세웠다.
12세기 초 수리 수리야바르만 2세가 단일 사원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앙코르와트를 총 200㏊의 넓이에 건축함으로써 앙코르제국의 영화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7년간 2만5천명이 동원되어 7t짜리 기둥 1천800개에 260개의 방을 지었는데, 현대의 첨단기술로도 그 기간에 짓기 어려울 정도의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라 한다. 3단계로 치솟은 피라미드형의 사원에 우뚝한 5개의 탑 중 가장 높은 탑은 65.5m에 기와 한 장의 무게가 200~1천500㎏이나 된다고 한다. 총 길이 800m의 회랑에 힌두교와 관련된 사실과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1층 회랑의 지옥도에는 백성들을 불로 달구고 튀기고 내장을 꺼내 처형하는 장면과 그 형벌 도구들이 새겨져 있는데, 폴 포트는 이를 흉내내어 인민을 학살했다고도 한다. 이외도 많은 유적들이 저마다의 유서를 간직한 채 웅장하게 서있는데, 육중한 통돌로만 지어진 모든 건축물의 그 거대한 모습과 중량감이 보는 이들을 숨 막히게 압도한다.
그러나 이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은 참족, 샴족, 몽골 등 거듭되는 외침으로 허물어져 갔다. 마침내 1431년 아유타족의 침략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되어 1434년 크메르족은 이 도읍지를 버리고 종적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앙코르 유적은 1861년 프랑스인 탐험가 앙리 무어(1826~1861)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밀림 속에서 어둡고 깊은 잠을 자야 했다. 그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한 줄의 기록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앙코르제국은 어디로 갔을까? 영원할 줄만 알았던 제국의 찬란한 영화가 무참히 몰락하면서 종적조차 영원히 사라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거대한 건축물을 위하여 수많은 인민들이 희생의 제물로 받쳐졌을 것이다.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참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새긴 앙코르와트의 지옥도에는 간혹 벼락이 친다고 한다. 앙코르제국의 멸망은 외침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힘만 믿고 민심과 천심을 저버린 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민심을 외면한 권력은 허무하게 멸망하는 것임을 앙코르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다.(수필가∙마성중 교장)



등록일 : 2007-01-18  18:46:38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