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코로나 설날

이청산 2021. 2. 14. 11:55

코로나 설날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설날이다. 아이들은 아비 어미를 찾아올 수 없고, 아비는 어버이의 차례를 모시러 갈 수도 없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코로나19’라는 모질고도 질긴 괴물 탓이다.

  ‘설날설다낯설다에서 왔고, 그래서 설날은 낯선 날’, ‘익숙하지 않은 날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더니, 올 설날이야말로 어느 정당에서 말하듯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설날이 될 것 같다.

  명절은 그리움의 날이다. 타향 객지에 나가 사는 붙이가 그립고, 고향 집에서 애태우고 계실 부모님이 그립다. 명절 하루라도 저승에 계시는 어버이를 이승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에 더욱 그립다. 그런데도 안 만나고 안 모셔야 효도라는 구호가 참으로 해괴하다.

  ‘설날의 어원을 섧다에서 파생된 서러운 날에서도 찾기도 한다.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걸 서럽게 여긴다는 뜻이라던가. 그거야 자연의 일이라 서러울 것도 없지만, 올 설날은 말 그대로 서러운 날이 될 것 같다. 그 조그만 바이러스 하나 쉽사리 물리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이 서럽지 않은가.

  사람의 그 무능이 안타깝고, 사람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임무를 지고 있는 사람들의 섣부른 처사가 원망스럽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안타까워하고 원망해도 당장 달라질 게 별로 없다는 것이 더욱 딱하고 답답하다.

  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멀리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림자로라도 만날 길이 없을까. 막연히 마음만 가까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는 방도가 없을까. 

아이들의 온라인 학습방법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 그렇게 해보는 거다. 부모님 차례를 모실 큰댁에 연락하여 시각을 맞추어 동시에 예를 올리자 했다. 객지 먼 땅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화상으로 세문안을 하고 차례를 올리도록 했다.

  원단, 새해 아침 해가 올랐다. 큰댁에서 제수 진설을 모두 할 것이지만, 나도 조그만 상이나마 차리되, 지방(紙榜)은 큰댁에서만 모시도록 했다. 한 신주 아래 상을 하나 더 드리는 것이다. (ZOOM)을 에스엔에스에 연결하여 아이들을 불렀다.

  약소하게나마 차린 상 머리에 아들, 며느리, 손주들이 화상으로 앉았다. 아이들은 환호를 불렀다. 할미는 손주들을 보고 화상을 얼싸안을 듯 감격에 겨워했다. 우선 세배부터 하라 했다. 제 아비, 어미에 이어 어린 것들이 손을 모으고 너부죽이 엎드린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그래 너희들도 아픈 데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올해도 좋은 책 많이 읽도록 해라. 세뱃돈은 통장에 넣어주마. 코로나가 물러나면 어서 달려오너라.

  큰댁에서 진설이 다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 지금 예를 올리지요. 분향은 큰댁에서 하고 강신례부터 함께해 나갔다. 잔을 드리고, 떡국에 숟가락을 꽂고 유식을 거쳐 사신례에 이르기까지 큰댁 형님과의 동선을 맞추려 했다. 화상 속의 아이들은 나를 따라 배례를 함께 해나갔다. 

차례의 모든 절차가 끝났다. 부모님이 보고 계신다면 무어라 하실까. 즐겁고 기쁘게 여겨주실까. 마음으로도 정성을 다하지만, 의식을 잘 치르는 것도 마음 못지않게 중한 것이 우리네 습속이라 생각하며 늘 하던 대로 하려고 애썼다.

  큰댁과는 의례 시각을 맞추어 거리를 좁히고, 아이들과는 화상으로 함께한 코로나 설날-.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의례의 방법이라 낯설기는 했지만, 그렇게라도 하고 나니 그래도 산 설날이 된 것 같고, 그리움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무슨 큰일을 해낸 듯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 아이들과 함께한 영상을 지인 몇 사람에게 보내며, 나는 코로나 설날을 이렇게 보냈노라며 자랑삼기도 했다. 신세대도 아니면서 현대 문명을 잘 부리고 있다며 은근한 찬사를 보내오는 지인도 있었다.

  견우직녀도 다리로 만났듯,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고 했다. ‘떨어짐쓸쓸함사이에 화상이라는 다리를 놓아 그 다리를 통하여 모습도 나누고 마음도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며, 붙이를 향한 그리운 마음을 푸는 일과 함께 그 모진 코로나를 이겨내는 성전을 치러낸 것 같기도 했다. 그놈들을 힘으로 쫓아내기가 어렵다면 마음의 성벽이라도 굳게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 코로나 설날, 마음의 승리 장군이 된 듯한 쾌감에 젖는다. 이놈의 코로나, 아무리 쳐들어와도 내 성벽은 절대 무너뜨리지 못할 거다.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지 않고서는 안 될 거다.

  나의 오늘 설날은 설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내 앞에서 기를 못 쓰는 바이러스를 보며 익숙하고도 따뜻한 설날을 보냈다.

  그 따뜻함을 든든히 누리기 위해 얼굴을 마스크에 다시 깊이 묻는다.

  진정 설지도 서럽지도 않은 많은 설날을 위하여.(20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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