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개망초

이청산 2014. 6. 18. 20:33

 

개망초

 

 

아침 강둑길을 걷는다. 비가 내려도 눈이 와도 언제나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강둑길을 걸을 때면 늘 동무들이 있어 좋다. 고개를 돌려 보면 맑은 소리로 흐르는 강물이 말동무가 되고, 눈길을 가까이로 당기면 길섶에 함초롬히 피어있는 풀꽃들이 길동무가 된다.

명지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산괴불주머니며 미나리냉이꽃, 애기똥풀이 수줍게 머리를 내밀고, 메꽃이며 금계국이 꽃잎 자락을 한껏 벌리는가 싶더니 봄도 저만치로 가버린다. 가는 봄의 뒷자락을 잡고 소록소록 피어나는 풀꽃이 있다. 개망초다.

우뚝우뚝 솟은 꽃대 위에 잔잔한 꽃송이들이 노란 꽃술을 가운데 두고 하얀 꽃잎들을 송송 앙증맞게 벌리고 있다. 꽃의 모양이 계란을 터뜨려 놓았을 때의 노른자위와 흰자위를 닮았다 하여 계란꽃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꽃이다. 하나하나 핀 모습은 서너 살 아가들이 방싯거리는 귀여운 웃음 같기도 하고, 산야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광경은 소금을 뿌린 듯 숨이 막힐 지경이라던 이효석의 메밀밭 같기도 하다.

개망초꽃이 피는 것을 두고 어느 시인은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개망초꽃, 안도현)고 했지만, 개망초는 내가 늘 다니는 강둑은 물론 논두렁, 밭두렁, 들판의 길섶, 어디서나 흐벅지게 잘 피어난다.

또 어느 시인은 발정난 암캐모양 물불 안 가리고 번식하는 꽃 소문난 꽃 여기저기 버려진 자식 많은 꽃 지겨운 꽃 이제는 그만 피어도 좋은 꽃 무심한 꽃 너무 많아 모두들 그냥 지나치는 꽃 다만 꽃은 꽃일 뿐 아니냐는 꽃 슬픈 꽃 개망초꽃”(강연호, 개망초꽃)이라며, 물불 안 가리고 염치없이(?) 지천으로 피어난 개망초꽃의 모습을 숨도 안 쉬고 질타하듯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하도 널브러지게 피는 꽃이라 이름에 라는 접두사를 붙인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이 풀꽃은 농사꾼들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존재다. 밭둑에 넘쳐 나다 못해 조금만 손보지 않으면 밭이랑 사이에도 마구 돋아나 애를 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두 해만 짓지 않고 두면 쉽사리 묵밭을 만들어 버리는 주범도 바로 이 풀꽃이다.

옛날 중국의 초나라 적에 전쟁터에 나간 남편 걱정으로 병을 얻은 아낙네가 혼자서 힘든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뽑아도 뽑아도 없어질 줄 모르는 이 풀을 뽑아 밭둑으로 던지며, "이 개같이 망할 놈의 풀!"이라고 하며 원망을 끓이다가 쓰러져 죽었다는, 그래서 그 이름이 개망초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전설도 있고 보면, 농부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던 것인지 알만하다. 요즈음은 제초제가 잘 개발되어 농부들의 수고를 덜고 있지만, 그래도 여름 들어서면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풀꽃이 바로 개망초다.

개망초는 원산지가 북아메리카인 귀화식물로, 일제 강점기 때 철도를 놓기 위해 가져온 침목용 나무에 씨앗이 묻혀서 들어와 나라를 망친 꽃이 되었다고 망국초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6.25동란 때 밀가루포대 같은 구호품 속에 섞여 들어와서 미군들의 군화 발자국에 묻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고난의 역사를 안고 있는 풀이기도 하다.

이렇듯 서글픈 전설이며 참담한 유래를 지닌 꽃이지만, 개망초꽃이 그토록 푸대접을 받고 업신여김을 당해야만 할 꽃일까.

망국의 한이 얼마나 컸으면 그 미미한 씨앗에게까지 한풀이를 하려 했을까만, 무엇에 묻혀 들어오고 나가고 퍼지고 하는 것은 그들의 종족을 번식시키고 전파하는 수단이요, 생존의 한 방법일 뿐이다. 사람들도 그런 방법을 통해서 서로 문화와 역사를 나누며 살고 있지 않은가. 묻혀서 들고 나든 업고서 나고 들든, 인간 세상에도 지금 다문화의 꽃들이 아주 성하게 피고 있지 않은가.

쓰잘데없는 것이라고 예초기가 지나간 두렁에 제일 먼저 쓰러져 누워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쓸모가 없기만 할까.. 어린잎은 국을 끓이거나 나물로 데쳐 먹기도 하며, 감기, 학질, 간염, 장염, 설사 등을 다스리는데 처방되기도 하고, 여름 한철 퇴비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그것 아니라도 먹을거리도 많고, 약도 많고, 비료도 많은 세상이라 쓰일 일이 예 같지 않지만,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라 인공의 문명에만 탐닉하는 인간의 탓일 뿐이다.

지천으로 많이 피어 있기로 귀하지 않은 꽃인가. 그 생명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왕성하기에 피고 살 곳을 따로 가리지 않고 그리 무성하게 피어날 수 있을까. 삶이 곤고하고 적막하게 여겨질수록 개망초꽃을 돌아볼 일이다. 그 지치지 않는 삶의 의지를 닮을 일이다.

오늘 개망초꽃을 다시 본다. 동전 하나보다도 작은 것이 노란 꽃술을 중심으로 가녀린 꽃잎을 총총 벌리고 있는 품은 앙증맞다 못해 애틋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움은 죄가 아니라며/ 너그러운 속마음 보인 채/ 지천에 핀 망초꽃/ 한낮 뙤약볕 밀려올 땐/ 흔한 웃음 보이며/ 내면의 그늘 숨기려한다.”(곽대근, 망초꽃)라고 노래한 시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무엇에겐가 그리움이 깊어 그 간절함으로 쑥쑥 대궁을 뽑아 올려 먼 하늘 향해 꽃잎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움 하 많아 저리도 많이 피어난 것일까. 그립고 그리운 마음들은 가슴 속에 꼭꼭 넣어둔 채로-.

하늘 향해 쪽쪽 피어오른 개망초꽃을 보면서 생각한다. 사무친 그리움이 가슴속 원으로 삭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난다면 개망초꽃 한 묶음을 쥐여 주고 싶다. ‘화해라는 꽃말도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숨 막힐 듯 흐벅져 있는 꽃 속에 같이 누워 꽃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201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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