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섬·파도 -여기는 울릉도·33

이청산 2008. 4. 9. 09:49

섬·파도

-여기는 울릉도·33



저동항 해안에 길이 났다. 촛대바위 남쪽 해안에서 사구내미 언덕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다. 그 길로 가면 저동항 부근의 해안이며 등대 하나 외로이 서 있는 사구내미 언덕의 수려한 경치를 즐길 수 있고, 언덕을 올라 행남등대에 이르면 섬의 동남쪽 바다며 고깃배들이 꽃무늬처럼 도열해 있는 저동항의 아름다운 정경을 한 눈에 담아 볼 수 있다. 등대를 내려오면 길은 사뭇 해안을 따라 도동항으로 이어진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푸르고 광대한 바다가 어울려 빚어내는 절경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한다.

그 '설렘'을 위하여 길이 닦여진 것이다. 그 길 닦기는 참으로 험난했다. 촛대바위 방파제에서 사구내미 언덕으로 향하는 해안은 내처 바위 절벽이다. 2백5십만 년 전 섬에 화산이 분출할 때 흘러내리던 용암의 모습 그대로 굳어진 험악한 절벽이다. 그 절벽에 붙여 길을 내기란 여간 험난한 일이 아니었다. 기슭을 깎아 길을 내는 것은 물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기 위해 아치형 다리를 다섯 곳, 평판 다리를 세 곳에나 놓았다. 그리고 한 곳은 굴까지 뚫고, 언덕바지 오르는 길은 57미터의 원통을 세워 나선형 계단을 돌고 돌아 오르도록 했다.  

길만 닦아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바다 쪽 길섶을 따라 줄곧 쇠기둥을 박은 튼튼한 난간을 세워야 했다. 난간 곳곳에는 빨간색 구명 튜브와 밧줄을 달아놓았다. 언제 그 험난한 파도가 이 기슭을 향하여 휘몰아쳐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친 파도가 경치를 완상하며 걷고 있는 길손을 어떻게 휘감아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동 해안 산책로에서 관광객이 파도에 휘말려 실종이 된 일도 있었다. 험한 파도에 대비하는 일이란 섬사람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방책이다.

단단한 콘크리트 포장길에 튼튼한 철난간까지 세워놓고 기슭 어느 한 곳은 평평히 닦아 파고라와 벤치를 설치하여 지나는 길손들이 쉬기도 하고, 바다와 해안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맑고 푸른 날이면 수평선 저 너머로 독도가 보일 듯도 하고, 북쪽으로는 전사의 투구처럼 솟아 있는 북저바위,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떠 있는 작은 섬 죽도가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룬다. 러일전쟁 때 침몰되어 가라앉아 있다는 보물선 돈스코이호의 전설을 간직한 저동항 앞바다는 깊은 수심만큼이나 신비감을 깊게 한다. 그 해안 길은 섬의 또 하나의 명물이 되어 갔다.

그 길이 놓인 지 서너 달쯤이나 되었을까. 어느 날 그 해안 길을 가보니, 아무리 험한 파도가 밀어닥쳐도 길손을 든든히 지켜 줄 것 같던 난간이 길섶 군데군데에서 뿌리도 남기지 않고 휑하게 쓸려 나갔다. 난간을 이어주 던 색색의 굵은 쇠줄도, 빨간 구명 튜브며 하얀 밧줄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풍주의보가 내리고 바람이 몹시 불더니, 그 바람에 거세게 몰아닥친 파도가 난간을 휩쓸어 간 모양이다. 파도가 얼마나 세찼으면 그 쇠기둥을 무참히 쓸어 갔을까.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놀람에 이력이 난 것이다.

섬사람들은 늘 파도와 더불어 살고 있다. 배를 몰아 바다에 나가면 파도와 먼저 싸워야 하고, 싸우다 지치면 목숨까지도 내 놓아야 한다. 저동항 촛대바위에 고기잡이 나간 늙은 아비를 기다리다 돌이 된 소녀의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것도 그 파도 때문이다. 파도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짓이긴다. 테트라포트도 부수고 방파제도 부수고, 길도 끊어버리고 산도 무너뜨린다. 파도는 또 일쑤 뱃길을 끊어버린다. 뱃길 끊어진 섬은 그야말로 절해고도다. 오직 뱃길만이 뭍을 오가는 통로이거늘, 거의 모든 물자들을 뭍으로부터 들여와야 하거늘, 뱃길 끊어지면 섬사람들은 한없이 외롭고도 고달프다.

섬으로 몰려오는 파도는 물에서만 일지 않는다. 바다에서만 오지 않는다. 땅에서도 일고 뭍으로부터도 오고 있다. 그 파도는 섬의 골목길에서도 일고, 뭍에서 부는 바람 따라 섬으로 몰려오기도 한다. 섬은 '3무'를 자랑해 왔었다. 뱀과 공해와 도둑이 없다는 말이다. 뱀과 공해야 지금도 없지만, 도둑이 과연 없을까. 도둑이 없을 만큼 지난날의 순후한 인심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까. 그렇게 믿는 섬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좁은 섬 안에서 뺑소니 사고의 범인이 한 해가 다 되도록 잡히지 않고 있다. 다방과 유흥주점들이 불법 영업을 하다가 적발되어 영업정지 처분을 받기도 한다. 뱃사람들끼리 싸워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섬에도 권력자가 있다. 자리 권력도 있고, 돈 권력도 있고, 펜 권력도 있다. 권력 있는 사람이 권력 없는 사람들을 고단하게 할 때가 있다. 섬에도 애증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다. 인구가 삼만 명에 가깝던 때에도 그렇지 않았는데, 만 명이 될까 말까 한 지금의 섬 살이가 훨씬 더 각박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에 그런 일이 이리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 섬사람들은 뭍에서 몰아닥친 문명의 어두운 그늘들이라 생각하고 있다. 뭍에서 밀려온 이 검은 파도-. 섬사람이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파도라 여기고 있다. 섬사람들은 늘 휘몰아치는 파도와 싸워왔다. 싸우다 지치면 파도 속으로 휘감겨 갈지언정 맞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파도는 섬사람들은 더욱 강인하게 만든다. 그 검은 파도와도 섬사람들은 싸울 것이다. 이겨낼 것이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파도에 쓸려간 저동항 해안 길 난간이 말끔히 복구되었다. 더 튼튼한 쇠기둥을 박아 놓았다. 더 굵은 밧줄을 메어 놓았다. 사구내미 언덕 아래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가 새로 세운 은빛 난간을 더욱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200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