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여기는 울릉도.32

이청산 2008. 3. 1. 11:33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여기는 울릉도·32



 이월이 가려하고, 삼월이 오려한다. 학교의 이월은 헤어짐의 달이자 만남의 달이다. 정해진 학업을 마친 아이들은 떠나고, 새로운 아이들이 학교를 찾아온다. 가고 오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선생님들도 가고 온다. ㄱ선생, 두 ㅂ선생, ㅇ선생이 섬을 떠나고, ㄹ선생, ㅇ선생, ㄱ선생, ㅂ선생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섬을 떠나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한결같이 보듬는 것은 '희망'이다. 섬 살이란 고단하고 고독한 것이지만, 그 '고단'과 '고독'이 보람의 빛을 낼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섬을 떠나고 섬을 찾아오는 것이다..

남들은 정해진 근무 기간 삼 년을 다 채우고 섬을 떠나는데, 섬 살이 한 해만에 떠나는 ㅇ선생은 '희망'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가족을 뭍에 두고 혼자 와서 물길 오백여 리 떨어진 절해고도를 살다보니, 가장이 집을 비운 사이에 가정에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이다. 혼자 와서 섬을 사는 사람들은 마음의 고단을 벗어나기 어렵다. 가족이 그리워서도 고단하지만, 혹 가정에 뜻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고독한 섬 살이를 더욱 고단하게 할 때가 있다.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가정의 일들을 지키기도 어렵고, 혹 변고가 생겨도 쉽사리 달려 갈 수도 없다. 그런 가정사를 걱정할 것이 없거나 이겨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섬 살이를 결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앞일을 내다보기 어려운 것이 또한 사람살이가 아니던가. 이 선생은 희망 대신에 고뇌만 가득 안고 무거운 걸음으로 섬을 떠나는 배에 올라야 했다. 열심히 해 보려 했던 섬 살이었는데…….

섬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들 열심히 섬을 살려고 애를 쓴다. ㅂ선생도 그랬고, ㄱ선생도 그랬다. 그것은 섬 살이의 고단을 이겨내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더욱 빛나는 희망을 갈무리하는 일이기도 했다. ㅂ선생은 늘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그는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들을 불러 앉혀 놓고 과외의 공부를 시키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공부하게 만들어 놓고 모르는 것, 궁금한 것을 물어 깨치게 했다. 책이 필요하면 뭍을 다녀오는 길에 사다 주기도 했다. 책값이야 물론 ㅂ선생 의 몫이다. 아이들을 위한 그 이바지가 고맙다고 말하면, '재미지요, 뭐……' 하며 겸연쩍게 웃는 ㅂ선생, 그 정성 덕분인지 시험을 치면 ㅂ선생의 과목은 성적이 우수했다. ㅂ선생이 섬을 떠나던 날, 아이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닦기도 했다. 부두에서 승강대를 올라 선실로 들 때까지 아들은 떠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연휴를 맞아 모든 선생님들이 뭍으로 향할 때도 ㄱ선생은 학교를 지켰다. 남들이 학교를 비울 때면 학교를 지켜야 할 사람은 으레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번쯤 뭍에를 나갈까? 그도 뭍에는 그리운 가족이 있고, 처리해야 할 가정사도 있을 터인데, 그러나 그는 선공후사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언제 무슨 일을 부탁해도 어렵다거나, 못하겠다는 법이 없다. 응당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과 아이디어를 다 쏟는다. 부탁하는 일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일을 찾아 스스로 해내기에도 지성을 다하지만, '일을 이리 이리 하라'고 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생각이 있으면 '이 일은 이리 이리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발의하거나, 혹은 '그리하면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 적시하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때로는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지만, 옳은 말이고 바른 판단임에야 듣지 않을 수 없다.

공자(孔子)가 안회(顔回)를 두고 "회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못 된다. 내 말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 無所不說)!"라고 말했다. 공자의 가르침에 안회는 너무나 크게 감동한 나머지 이의를 제기할 일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공자는 안회가 자신에게 새로운 것을 개척할 수 있는 자극을 주지 못함을 아쉬워 한 것이다.

ㄱ선생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서로가 쉽게 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을 더욱 바람직하게 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ㄱ선생은 학교를 위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큰 도움을 남겼다. 그'도움'을 고스란히 남겨 놓고 ㄱ선생은 섬을 떠나갔다.

법이란 참 무정한 것이다. 섬 살이는 삼 년만 해야 한다. 섬을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더 살게 잡아 두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다. 더 머물고 싶어해도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가려 해도 붙잡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섬 살이 삼 년이면 누구도 더는 머물 수 없고 머물게 할 수도 없다. 단지 잘 있으라며, 잘 가라며 서로 손을 흔들 뿐이다. 섬에 들어올 때 꾸었던 꿈을, 뭍에 가거든 하루 빨리 이루라며 빌어 줄 뿐이다.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는 법, 새로이 꿈을 안고 섬을 찾아오는 ㄹ선생, ㅇ선생, ㄱ선생, ㅂ선생-. 낯선 사람들이 아니다. 대개는 지난날에 이미 섬에 와 있는 누구랑 함께 근무를 했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이런 저런 친분들을 다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의 경륜이 쌓여야 섬으로 올 수 있는 까닭에, 그 경륜들 속에서 몇 번씩은 만남의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다. 뭍에서 산전(山戰)들을 겪다가 이제 이 망망대해 속의 절해고도에 수전(水戰)을 겪으러 오는 사람들이라 할까.

이제 이들을 섬 가족으로 맞아 서로 안아주고 결어주며 섬 살이의 파도를 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 서로 안아주지 않고 결어주지 않으면, 섬 살이는 참 아득하고 고독하다. 망망한 바다만큼이나 아득하고, 섬의 외로움만큼이나 고독한 것이다. 새로운 섬 가족들도 희망을 보듬으며, 서로들 안아 주며 저마다의 정성으로 섬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 정성은 섬 살이의 험한 파도를 기쁨으로 이겨나가게 할 것이다.

ㄹ선생, ㅇ선생, ㄱ선생, ㅂ선생!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새로운 섬 가족이 된 것을!

새 희망의 주인공이 된 것을!♣(2008.2.25)